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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聖遠) 선사, 무상함을 자각하고 산중에 은거하여 독수행에 정진하시며, 자수교인(自修敎人)하고 오직 불호(佛號)에 의거하심

성원(聖遠) 스님의 속성은 하(何) 씨로, 산둥성 펑라이 출신이셨다. 젊은 시절 현학에 들어가 나라에서 식비를 지원하는 렴생이 되셨다. 후에 죽은 친구의 장례를 준비하다가 문득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속세를 떠나 출가하기로 결심하셨다.

성원(聖遠) 스님의 속성은 하(何) 씨로, 산둥성 펑라이 출신이셨다. 젊은 시절 현학에 들어가 나라에서 식비를 지원하는 렴생이 되셨다. 후에 죽은 친구의 장례를 준비하다가 문득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속세를 떠나 출가하기로 결심하셨다.

이후 바다를 건너 랴오닝, 조선 등지를 두루 찾아다니며 명망 있는 스님들을 찾아 가르침을 구하셨다. 멀리 머니를 떠돌다가 마침내 랴오닝성 랴오양현 천산의 중후이사로 돌아와 사고 선사를 참배하고 삭발 출가하신 뒤, 이어 텐진 해광사에서 득계하셨다. 그 후 관외를 떠나 다시 중후이사로 돌아와 조사들과 사고 선사를 참배하셨다. 이어 상방산으로 옮겨가 조용히 정진에 전념하셨다. 다시 윈티암자로 옮겨가 홀로 은거하며 고행을 닦으신 끝에, 선의 근본 원리를 깊이 깨달으셨다.

청나라 광서 26년(1900년) 경자년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 산으로 몰려든 피난민이 수없이 많았다. 성원 스님은 그들이 한결같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게 하시니, 모두 해를 입지 않았다. 몇 년 뒤 성원 스님이 북경에 오셨다. 1918년 연화사의 전랑 스님을 만나시니, 두 분은 즉시 마음이 맞아 깊은 교분을 맺으셨다. 1920년 연화사에 머물게 되시자, 전랑 스님이 곧 그의 만년을 돌보겠다고 약속하셨다. 성원 스님은 그 후 두 차례의 관을 닦아 모두 9년간 정진하셨다.

관정을 마치고 나오시니, 사부대중의 제자들이 모여들어 가르침을 청하셨다. 성원 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경전의 지혜와 입으로만 삼마지를 외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오직 행주좌와 네 가지 자세에서 언제나 아미타불의 명호만을 외심에 집중하되,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발음하고 늘 마음을 놓치지 않으며, 서방정토에 왕생하기 위한 참된 믿음과 간절한 발원을 함께할 때에야 비로소 참되고 실속 있는 법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느니라."

그 뒤로 성원 스님은 스스로 닦으면서 남을 가르치시고, 오직 서방정토만을 의지처로 삼으셨다. 전랑 스님도 그를 더욱 깊이 공경하셨다. 량원 스님이 전랑 스님에 이어 연화사 주지가 되신 뒤로는, 성원 스님을 더욱 높이 모셨다.

성원 스님은 늘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연화사에는 왕생을 이루는 세 가지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 있네. 원만한 대중, 알맞은 도량, 넉넉한 의식이 바로 그것이니, 나는 반드시 이곳에서 서방정토에 왕생할 것이네!"

그 때 또 하관 스님이 계셨는데, 성원 스님보다 2년 뒤에 연화사에 오셔 두 분의 뜻이 서로 맞아 함께 정토 법문을 수행하시므로, 서로 왕생할 때에 인도해 주기로 미리 약속하셨다.

1932년 음력 9월 24일, 성원 스님은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의 과를 행하셨으나, 음식이 조금씩 줄어들고 기력이 점점 쇠잔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진하시며 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칭명하셨다. 이날 하관 스님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이제 곧 왕생을 떠나실 준비를 하시는 모양이네요?" 성원 스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왕생할 때가 되면 그대가 직접 배웅해 주겠나?" 하관 스님이 말했다. "제가 반드시 몸소 서방정토까지 모시고 가겠습니다."

양원 스님이 성원 스님의 피곤한 기색을 보시고는 즉시 의사를 불러 진료하게 했으나, 치료가 전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양원 스님이 다른 의사를 불러들이려 하자 성원 스님이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왕생할 때가 왔다. 어찌 의사를 부를 필요가 있으랴?"

26일이 되자 그는 자주 시각을 물었다. 곁에 있던 사람이 그 뜻을 알아차리자 성원 스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자정에 서방 극락으로 떠나라." 그날 저녁 하광 스님이 말씀하셨다. "지금이 가장 중대한 순간이니 마음을 가다듬고 아미타불을 염불하시오." 성원 스님이 말씀하셨다. "이 늙은 스님은 무엇보다 아미타불 염불하기를 좋아하노라." 이에 승속 대중이 모여 그의 왕생을 함께 염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몸을 일으켜 결가부좌를 잡았다. 하광 스님이 물었다. "마음이 명쾌하십니까?" 성원 스님이 답하셨다. "어찌 명쾌하지 않으랴." 이윽고 고개를 들어 서쪽을 여러 번 바라보았다. 대중은 계속 함께 아미타불을 염불하며 그를 도왔고, 성원 스님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신 채 입적하셨다. 때는 27일 자정, 나이 72세, 출가한 지 37년이었다. 약속대로 하광 스님이 직접 찾아와 그를 극락으로 배웅했다.

성원 스님이 입적하신 뒤 기이한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는데, 열흘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불법을 믿지 않던 사람들은 "이것은 향수로 만든 가짜 냄새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이 말을 할수록 기이한 향기는 점점 더 짙어져 보통의 향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이에 비방하던 사람들은 더 이상 반박할 길이 없었고, 성원 스님이 과연 서방 극락에 왕생하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화장한 지 사흘 후, 승속 대중이 모여 유골을 거두었다. 삼보에 귀의한 재가 신도이자 성원 스님의 제자인 구영광은 스님의 수행이 진실한 줄 알고 있었기에 성스러운 사리(불교 유골)가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날 구영광이 다른 이들보다 늦게 도착하여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물었다. "사리가 발견되었습니까?" 대중이 대답했다. "아직 발견된 것이 없습니다." 구영광이 예를 마치자 갑자기 사리가 나타났는데, 찬란한 형형색색의 빛을 내고 있었다. 그 수가 무려 천 개나 되었으며, 모인 모든 사람이 한 몫씩 나누어 가졌다.

열흘 뒤 구영광과 몇 사람이 다시 화장터로 돌아가 각각 사리 몇 점씩을 더 거두었다.

(이 기록은 구영광이 보낸 편지를 바탕으로 정귀교가 정리한 것이다. 구영광이 정귀교에게 편지를 쓰던 무렵 성원 스님의 유골 처리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나중에 스님의 유언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가루로 갈아 밀가루와 섞어 환을 만들어 주머니에 담고 청도로 보내 바다에 뿌렸다. 이때 뼈로 만든 환이 저절로 달궈지면서 부드러워졌고, 바다에 뿌리고 난 뒤 그 주머니 안에서 다시 사리가 발견되었다. 이 책이 전통 목판 인쇄로 간행된 뒤 정귀교와 서위루 등이 후속 편지를 보내 이 보충 기록을 함께 싣도록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