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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고통의 근원은 아신견(我身見)에 있다

내가 부처를 이룰 때, 내 세계에 태어나는 천인(天人)들이 여전히 자기 육신에 대해 갈망과 애착, 그리고 분별심을 품는다면, 이 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나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지 않겠다는 서원이다. 이는 지극히 중요한 원이다. 육신통(六神通) 가운데 하나인 누진통(漏盡通)이라고도 불리는 이 원은, 여섯 신통 가운데 처음 다섯 통(通)은 범부(凡夫)나 외도(外道)의 수행자, 심지어 귀신(鬼神)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몸...

제십원(第十願): 나와 몸에 대한 집착과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원(願)

내가 부처를 이룰 때, 내 불토(佛土)의 천인(天人)들이 자기 몸에 대해 애착이나 탐착(貪著)과 분별을 일으킨다면, 나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지 않으리라.

내가 부처를 이룰 때, 내 세계에 태어나는 천인(天人)들이 여전히 자기 육신에 대해 갈망과 애착, 그리고 분별심을 품는다면, 이 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나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지 않겠다는 서원이다. 이는 지극히 중요한 원이다. 육신통(六神通) 가운데 하나인 누진통(漏盡通)이라고도 불리는 이 원은, 여섯 신통 가운데 처음 다섯 통(通)은 범부(凡夫)나 외도(外道)의 수행자, 심지어 귀신(鬼神)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몸에 대한 집착과 분별이 일어나지 않는 경지, 즉 누진통은 오직 성인(聖人)만이 갖추고 있다.

누진(漏盡)이란 번뇌가 완전히 소진(消盡)됨을 뜻한다. 아라한(阿羅漢)의 증과(證果) 차원에서 보면,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의 번뇌가 완전히 끊어지고 인무아(人無我)를 증득(證得)한 것이다. 인무아를 증득하지 못하면 앞의 오신통(五神通)은 쉽게 잃어버리게 된다. 불에 구워 굳히지 않은 질그릇이 폭풍우를 견디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경전에서도 그러한 예를 볼 수 있다.

가령 옛날에 오신통을 얻은 선인(仙人)이 있었다. 왕이 그를 극진히 존경하여 공양을 청하였다. 그는 매 보름마다 궁궐에 날아와 공양을 받았다. 그가 날아서 도착할 때마다 백성들은 모두 고개를 들어, 새처럼 날아드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온 나라 사람들이 그에게 얼마나 경건했는가를 보라. 그런데 어느 날 마침 왕이 외곽 지역 순시를 떠나 있었다. 그리하여 왕비에게 대신 선인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오신통을 얻은 선인이 도착하자, 천상의 아름다움을 지닌 왕비가 화려한 옷차림으로 나왔다. 왕비가 선인 앞에 예를 올리며 그의 발바닥에 손을 대는 순간, 선인의 마음에 단 하나의 부정한 생각 — 음욕(淫慾)의 생각이 일어났다. 그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신통(神通)이 사라져 더 이상 날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날지 못하게 되자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성읍의 백성들이 늘 나를 보고 싶어 했으니, 좋다. 이번에는 모두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걸어서 대문을 나서리라." 그러고는 걸어서 성문을 나섰는데, 이로써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덮으려 하였다.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가.

용수(龍樹) 보살도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비슷한 예를 든다. 옛날에 오신통을 가진 선인 무리가 허공을 날고 있었다. 마침 궁녀 무리가 연못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목욕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입술에서 나오는 노래가 지극히 요염하였다. 날던 선인들이 그 노래를 듣고 스스로를 억누르지 못하여 하나둘씩 허공에서 떨어졌다. 그러므로 번뇌가 끊어지지 않는 한 앞의 오신통은 결코 의지할 바가 되지 못한다. 반면 성인의 신통은 육신통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번뇌가 완전히 소진된 상태에 있다.

여기서 경전은 특별히 아신견(我身見), 즉 자아에 대한 인식과 자아에 대한 집착을 가리키고 있다. 모든 범부 중생은 타고난 아집(我執)을 가지고 있어 이 몸에 집착한다.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견고하고 영원한 '나'가 존재한다고 믿으며, 이 '나'라는 관념과 더불어 '나의 것', 즉 내가 소유한 것이라는 관념이 따라온다. 나의 명예, 나의 권력, 나의 아내, 나의 재산, 나의 차, 나의 별장, 나의 회사 — 모두가 다 내 것이다. 평생 동안 우리는 '나'와 '나의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틀 안에서 탐(貪)·진(瞋)·치(癡) 삼독(三毒)이 비할 데 없이 거세게 타오른다. 이는 전도(顚倒)된 상태로, 모든 고통의 근원은 아신견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대자비(大慈悲)로 스물두 해 동안 반야부(般若部) 경전을 설하신 것은 어찌한 까닭인가? 그것은 우리가 모든 법의 공(空)한 성품을 알아차리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 '나'가 진실하지 않음을 알게 하려 하신 것이다. 이 몸은 오온(五蘊)의 임시적인 화합체다. 그 물질적 구조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이루어져 있고, 정신적 측면은 팔식(八識)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궁극적 근원을 찾으려 해도 실체를 발견할 수 없다. 그 모두가 우리의 뿌리 깊은 망상(妄想)의 산물이다. 나타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생(生)하고 멸(滅)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허망한 몸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평생 바쁘게 살면서 그 모든 것이 이 환(幻) 같은 몸을 위해 바쳐졌으니, 참된 주인을 얼마나 원통하게 대했는가! 마치 도둑을 자기 아들로 알아버리는 것과 같다. 수행자의 입장에서 볼 때, 아신견은 반드시 돌파해야 한다.

우리는 몸의 허망한 본질과 마음의 여러 가지 더러움을 관찰해야 한다. 노자(老子)도 몸이 고통의 근원이라고 말했다. 몸이 있으면 고통이 있고, 마음이 있으면 번뇌가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고통과 번뇌에 빠져 있는 범부 중생이다. 그러므로 역대 조사(祖師)와 대덕(大德) 고승(高僧)들은 부처님의 말씀과 조사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때마다 우리가 아신견을 돌파해야 함을 일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