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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의 호를 일심으로 참회하고 극락왕생을 발원한다

이 보리심을 어떻게 수행해야 온전히 원만히 갖출 수 있을까? 다음 말씀이 그 답을 줍니다. “만덕을 두루 갖춘 아미타불의 명호를 일심으로 독송하며, 극락왕생을 발원하라.” 이 구절은 자신은 물론 법계의 모든 중생을 위해 무상등정각의 과보를 성취하려는 발심을 완전히 갖추는 유일한 길이, 만덕이 두루 갖춰진 아미타불의 명호에 일심으로 흩어지지 않고 독송하는 인위(因位)의 수행에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이 보리심을 어떻게 수행해야 온전히 원만히 갖출 수 있을까? 다음 말씀이 그 답을 줍니다. “만덕을 두루 갖춘 아미타불의 명호를 일심으로 독송하며, 극락왕생을 발원하라.” 이 구절은 자신은 물론 법계의 모든 중생을 위해 무상등정각의 과보를 성취하려는 발심을 완전히 갖추는 유일한 길이, 만덕이 두루 갖춰진 아미타불의 명호에 일심으로 흩어지지 않고 독송하는 인위(因位)의 수행에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일심이란 다른 방편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한 가지 수행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독송하고 수지한다”는 것은 그 명호를 마음속에 품어, 생각마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붙들어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만덕을 두루 갖춘 아미타불의 명호를 만덕호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만’이란 문자 그대로 만 가지 덕을 헤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존재하는 모든 것, 덕의 온전한 총체를 상징합니다. 이 단순한 소리, 이 신성한 언설인 아미타불의 명호 속에는 법장보살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법장보살이란 인지에서 무수한 겁 동안 수행한 끝에 과보에서 아미타불로 원만히 깨달은 존재입니다. 그는 무수한 겁에 걸쳐 정진한 수행으로 쌓은 모든 공덕을 자신의 법신·보신·화신, 사지·십력·십팔불공사, 그리고 그가 닦은 온갖 덕을 모두 합쳐 이 한 명호에 응축하였습니다.

이 명호는 무한한 공덕을 품고 있으며, 두 가지 핵심 덕인 무량광과 무량수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무량광과 무량수는 궁극적 실상의 그 자체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의 마음 핵심을 이루는 한 미세한 생각의 본성, 곧 일진법계의 본래 성품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아미타불의 무위이고 무루하며 청정한 모든 공덕, 그가 지닌 모든 덕이 소리와 상징으로 만들어진 이 명호에 온전히 응축되어 있습니다.

아미타불은 모든 부처의 왕이시며, 법계의 보물고 그 자체이십니다. 십방三世의 모든 부처님의 모든 덕이 그의 공덕 안에 모여 있습니다. 곧 이 한 명호에 지금 존재하는 모든 부처의 온전한 공덕이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광대하여 헤아릴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보배, 다함없는 보물고입니다.

이 보물은 믿음·서원·독송의 수행으로 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명호의 공덕을 캐내는 것은 곧 우리 본성에 깃든 공덕을 캐내는 일입니다. 명호와 우리 미세한 중생의 마음 본질은 구조적으로 서로 맞물려, 서로가 완벽하게 거울처럼 비춰 줍니다. 우리 미세한 한 생각 속에는 이미 명호의 구족된 모든 덕이 담겨 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숨겨져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번뇌에 얽힌 여래장, 곧 아직 번뇌에 휘감겨 있는 우리 안의 부처의 본성입니다.

아미타불의 명호는 과보의 공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미 번뇌의 얽음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지요. 이를 속박에서 벗어난 여래장이라 부릅니다. 이 속박에서 벗어난 여래장의 공덕으로 우리 자신의 속박된 여래장을 끌어내는 것이 바로 “과보의 깨달음을 인지의 마음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명호의 공덕을 캐낼 때, 그것은 곧 우리 본성의 공덕을 캐내는 것과 같습니다. 명호의 공덕을 더 많이 발견할수록 우리 내면의 본래 덕도 더 많이 드러납니다. 명호의 공덕을 한 점까지 모두 캐내면, 우리 자신이 마침내 아미타불이 됩니다. 이것이 만덕호의 참된 뜻입니다.

“극락왕생을 발원한다”는 것은 서쪽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명호의 공덕을 온전히 드러내어 신속히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이 가장 빠른 직접의 길입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일으켜 부처님의 명호를 독송하는 일이 반드시 함께 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대승의 보리심을 발하지 않고 부처님의 명호만 독송한다면 아미타불의 광대한 원의 바다와 상응하지 못해 결국 그곳에 왕생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미타불의 명호에 일심으로 독송하는 데 집중하지 않고 일반적인 범부의 보리심만 발원해도 왕생할 수 없습니다. 보리심과 부처님 명호 독송이 반드시 동등하게 소중히 여겨져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말은 일반적인, 세속적인 의미의 보리심을 두고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정토법문의 관점에서 보면 깊은 믿음과 간절한 서원에 이미 보리심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탄련 스님은 이 두 관점을 다음과 같이 종합하셨습니다. 정토종의 보리심이란 부처가 되고자 발원하는 마음입니다. 부처가 되고자 발원하는 것은 곧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 발원하는 것이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 발원하는 것은 곧 중생을 부처님의 극락국토로 인도하려 발원하는 것입니다. 곧 부처님의 명호를 독송하고 극락국토에 왕생을 구하는 것이 사실 보리심 그 자체입니다. 요컨대 부처님의 명호를 독송하며 극락국토에 왕생하고,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며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최상의 보리심입니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이 보리심을 원만히 이루기 위한 가장 먼저 필요한 전제 조건입니다.

무상보리의 온전한 열매를 신속히 성취하기 위해 수선童子조차 등각의 경지에 오른 후 서쪽 극락세계로 돌아가 그곳에서 홀연히 원만히 부처가 되도록 안내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