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 스님 블로그 인용문 — 돌연완전법
무량수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보편적 대승의 길을 걷는 수행자 가운데 무려 일억 명이나 무상정등정각(무상정등보리)을 구하는 길을 버리고 돌아섰다고 합니다. 그 까닭은 정토법문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왜 돌아섰을까요? 이 세상의 마장(魔障)의 힘이 너무나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자력에 의지하면 사견과 번뇌를 끊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불력에 의지해 업장을 안고 극락왕생하는 데 필요한 신심과 서원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 결...
정토 법문의 불호(佛號) 참송은 아미타불의 자비로운 원력(願力)에 의지해 업장(業障)을 안은 채 왕생(往生)하는 길입니다. 견사망혹(見思妄惑)을 끊을 수 있다면 가장 좋지만, 끊을 수 없다면 신원행(信願行)에 의지해 아미타불의 원력과 공명하며 업장을 지닌 채 왕생해 삼계(三界)를 횡초(橫超)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말법(末法) 시대 중생들의 유일한 해탈 길입니다! 자력(自力) 수행의 어려움을 알 때에야 비로소 불력(佛力)에 의한 횡초의 간편함을 더 깊이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이 일생에 무량겁(無量劫) 동안 풀지 못했던 생사의 대사를 한 번에 해결해주는, 최상의 묘원돈법(妙圓頓法) 법문입니다.
인광 대사는 저서에서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토의 업이 이루어지면 선의 도리도 자연히 통달하게 된다.” 진실로 일심불요(一心不亂)의 참송, 즉 불요삼매(念佛三昧)를 얻으면 선문(禪門)의 모든 깨달음이 자연히 온전히 깨닫게 됩니다.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 즉 관경(觀經) 중품하생(中品下生)에는 불호를 참송하면 지옥이 곧 정토 세계로 바뀐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십법계(十法界)에서 이 두 극은 가장 낮은 법계에서 가장 높은 법계로의 돌연한 전환으로, 단번에 아홉 법계를 초월하는 것이니, 어느 다른 법문이, 어느 다른 소리가, 어느 다른 명호(名號)가 이처럼 묘원한 힘을 지니겠습니까?
“나모 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의 여섯 글자는 모든 법의 왕인 포괄 다라니(陀羅尼)라 해서 “육자대경왕(六字大經王)”이라고 불립니다. 조사(祖師)들은 한 가지 진리를 거듭 우리에게 밝히셨습니다. 대승(大乘)·소승(小乘) 경전에서 설하신 모든 법이 이 여섯 글자의 주석(註釋)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여섯 글자는 모든 불교 교의(敎義)의 최고 결정체이자 포괄 정수(精髓)입니다. 이 여섯 글자를 참송하는 것은 곧 모든 법을 참송하는 것과 같습니다.
업력(業力)에 얽매인 보통 중생인 우리는 너무 고상한 말만 늘어놓지 말자. 업력에 짓눌린 중생은 반드시 형상을 통해 시작해야 합니다. 정토 법문이 바로 이 형상을 마련해 우리 같은 중생이 수행을 시작할 길을 열어주는 것이니, 이를 방편(方便)이라 하니, 정토 법문은 바로 “방편 중의 제일 방편(第一方便)”입니다.
서쪽 극락정토(極樂淨土) 아미타불 부처님 아래에는 무수한 성문(聲聞) 제자들이 있습니다. 성문이란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성인(聖人)을 말합니다. 부처님 일생의 가르침(敎) 가운데 특히 강조하시는 바는, 성문이 보리심(菩提心)을 발하지 않으면 결코 부처님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바다처럼 광대하신 자비 원력(願力)으로, 그분은 이 성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 성문들이 극락정토에 왕생한 뒤에는, 아미타불의 정토 안에서 자연히 보리심을 발하게 됩니다.
“일체 부처님의 원만구족한 지혜의 바다는 마음의 한 생각에서 일어난다.” 아미타불의 법계 만지지혜의 바다는 곧 일체상지(一相相智)를 체득한 것입니다. 우리 같은 보통 중생도 본래 일체상지를 갖추고 있으나, 분별집착(分別執着)에 가려져 있을 따름입니다. 명호 안에 함유된 지혜를 통해, 우리 본래 내재한 지혜가 계발될 수 있습니다. 불호를 한 번씩 참송할 때마다 아미타불의 지혜가 드러납니다. 복과 지를 닦는 일 또한 모두 이 명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신·원·행은 모든 공덕 가운데 최고의 공덕이자, 모든 선행 가운데 최고의 선행이며, 모든 지혜 가운데 비길 데 없는 최상의 지혜입니다.
정토법문은 그 어떤 가르침보다도 깊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짧은 음상(音相)의 나열에 불과하지만, 시방 삼세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모두 품고 있으니까요.
정토법문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형상(상·相)을 드러낸다는 점이지요. 이 아미타불의 명호(名號) 또한 하나의 형상이고, 정토의 갖가지 장엄 또한 형상입니다. 이 모든 형상은 법성(法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아미타불의 열반 삼덕과 상·락·아·정의 네 가지 본래의 덕을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형상에 머물러 수행하면, 곧 불과(佛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정토왕생을 위한 불명수행의 법문은 아홉 계(九界)의 모든 중생이 믿기 어려운 완전한 돈오(頓悟)의 방편입니다. 악인은 물론이거니와 선인조차 믿기 어렵고, 선인은 물론이거니와 이승(二乘)의 수행자들도 완전히 믿지 못하며, 이승 수행자들만이 아니라 삼현(三賢) 보살들도 완전히 믿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서 이 법문을 설하는 것은, 「온갖 어려움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이니,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노라!」 라고 한 말이 있지요.
「이 마음이 부처를 만들고,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축생을 만들고, 이 마음이 곧 축생이며, 이 마음이 아귀를 만들고, 이 마음이 곧 아귀이며, 이 마음이 인간을 만들고, 이 마음이 곧 인간이며…… 이 마음이 부처를 만들고,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 」
한 생각(一念)에 십법계(十法界)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이 순간의 생각이 어디에 머무는지는 오직 '만들어냄'의 문제로, 우리의 가치관과 행동, 주관적 선택에 따라 결정됩니다. 무명(無明) 한 생각이면 축생계가 나타나고, 탐욕 한 생각이면 아귀계가 나타나며, 오계(五戒)와 오상(五常)을 지키는 한 생각이면 인간계가 나타나고, 사성제(四聖諦)를 수행하는 한 생각이면 성문계가 나타나며,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널리 행하는 한 생각이면 보살계가 나타나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염념하는 한 생각이면 불계(佛界)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만들어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라고 하는 것은, 아미타불의 온전한 공덕이 우리의 생각 속에 항상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밤마다 부처님과 함께 누워 자고, 아침마다 부처님과 함께 일어나며,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모든 순간에 한 순간도 부처님과 떨어지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염하는 이 순간에, 이미 부처님의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추고 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이 마음이 부처를 만들고,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라는 원리가 작용하기 때문이지요. 여기에서 마음의 본성(心性)에 대한 매우 중요한 원리가 드러납니다. 우리의 마음은 육도(六道)의 일반 세계에서부터 사성(四聖)의 성스러운 세계에 이르기까지 십법계를 모두 품고 있어, 한 마음 안에 모든 세계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명호는 우리를 깨우치기 위해 쉬지 않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동안, 아미타불의 명호가 거듭 울려 꿈속의 꿈꾸는 이를 깨웁니다. 깨치는 주체와 깨침의 대상이 둘이 되어 하나가 되면, 「서리 내린 달빛이 온 하늘에 비쳐 외딴 숲을 환히 밝히네」라는 구절이 그 상황에 잘 어울리지요.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래·제세간(調御丈夫)께서는 법계의 몸이시라, 모든 중생의 생각 속에 들어가시노라」. 이 구절은 우리 마음의 법계 본성이 지닌 비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이 한 생각 속에 아미타불의 온전한 공덕이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정토법문의 방편은 현상의 형식에서부터 수행을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조건 붙은 마음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 마음으로 부처님 이름을 염하는 것이지요. 이 부처님 이름은 곧 진여의 발현이에요. 마음이 부처님을 떠나지 않고 부처님도 마음을 떠나지 않으며, 이 이름에 한 마음 쏟아 부처님을 기억하고 엘 때, 바로 그 순간 진여와 자성이 서로 통하는 경지가 되어 미묘하게 묘도에 맞아들어 방편으로 무생법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서방정토의 현상과 원리, 인연은 이 땅의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섭니다. 본래 우리와 같은 범부의 인식 밖에 있는 것이지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모든 면을 꿰뚫어 보시는 지혜로 법회에 모인 중생들의 근기를 살피시어, 그들이 정토법문을 듣고 믿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큰 이익을 누려야 함을 아셨습니다. 이 정토법문이 탁하고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하는 데 가장 큰 효과가 있고 그 필요가 가장 절실함을 드러내시어, 아무도 묻지 않아도 직접 설해 주셨습니다.
『불설무량수경』의 번역본을 살펴보면, 한나라부터 위나라·진나라·남북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벌써 10종의 번역본이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이 경전 번역자들이 유독 이 경전을 번역하는 데 힘을 쏟았을까요? 첫째, 이 번역자들은 가장 핵심적이고 실용적인 경전을 번역하고자 했습니다. 불교의 정수와 초탈의 본래 뜻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것이 정토법문이고, 그 정토법문의 내용이 주로 이 『불설무량수경』에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둘째, 이는 동방 땅에 사는 이들의 세간을 초월한 선근이 이미 성숙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만약 중생이 본래 무량광과 무량수의 덕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면, 아미타불의 성호(聖號)가 세워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성호가 세워질 수 있는 전제는, 중생의 마음속에 본래 무량광과 무량수의 덕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만약 중생이 아직 수행의 인위(因位)에 있을 때, 과위의 깨달음인 아미타불의 성호가 그 마음에 비추어지지 않았다면, 우리 마음속에 자리한 무량광과 무량수의 본래 덕은 드러나거나 발현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름에 의지해 자성을 드러낸다」는 말은 정토법문의 가장 큰 특징이에요.
사실 희락의 서방정토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어찌하여 임종하는 순간 아미타불이 영접하러 오시면, 손가락을 튕기는 한 찰나, 팔을 굽혔다 펴는 짧은 순간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일까요? 어찌 그리 빠를 수 있나요? 상식적으로 빛의 속도로 천만 억 나유타 세계를 넘어 간다 해도 도착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텐데요. 하지만 정토법문은 시간도 공간도 초월한, 모든 현상이 서로 막힘 없이 하나로 통하는 경지입니다. 염하는 이의 자성 공덕의 힘까지, 이 세 가지 힘이 합쳐져 헤아릴 수 없는 묘한 효과를 발현하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가족과 후손이 있다 해도, 정토에 왕생하지 못하면 윤회를 떠도는 과정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결국 놓아주어야만 합니다. 희락의 서방정토에 왕생하면 천안으로 가족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즉시 알아볼 수 있고, 중생의 세계로 돌아갈 능력도 갖추게 되어 그에 맞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가족들을 이끌고 변화시킴으로써, 진정으로 가족들의 이익을 도울 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