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 대사 약전
신수 대사는 605년에 태어나 706년에 입적해 102세까지 살았다. 혜능 대사보다 35세나 많았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젊은 시절 경사(經史)를 공부한 뒤 세속을 버리고 출가했다. 50세가 되어 선종 제5조 홍인(弘忍)을 찾아가 법을 구했다. 당나라 장악(張說)이 지은 《옥천사 대통선사 비명(玉泉寺大通禪師碑銘)》에는 신수를 "키가 여덟 자에 달하고, 눈썹이 넓으며 귀가 수려했으며, 위엄과 덕이 뛰어나 군주의 기품을 지닌...
신수 대사는 605년에 태어나 706년에 입적해 102세까지 살았다. 혜능 대사보다 35세나 많았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젊은 시절 경사(經史)를 공부한 뒤 세속을 버리고 출가했다. 50세가 되어 선종 제5조 홍인(弘忍)을 찾아가 법을 구했다. 당나라 장악(張說)이 지은 《옥천사 대통선사 비명(玉泉寺大通禪師碑銘)》에는 신수를 "키가 여덟 자에 달하고, 눈썹이 넓으며 귀가 수려했으며, 위엄과 덕이 뛰어나 군주의 기품을 지닌 인물"이라 기록했다. 모든 기록이 그가 당당한 인물이었음을 전하는데, 이는 육조의 수수한 모습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홍인의 제자들 사이에 들자 신수는 "6년간 밤낮으로 쉴 새 없이 정성껏 모셨다." 홍인은 그를 가장 아끼며 "통찰력과 원만한 조명(照妙)에 있어 가장 뛰어나다"라 칭찬하고 "동산의 법이 모두 신수에게 전해져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회중의 교수사로 임명되었다. 제5조가 입적한 뒤 신수는 강릉 당양산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동산의 묘법을 널리 펴기 시작했다. 신도와 구도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당양은 곧바로 선 수행의 주요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700년, 구시(久視) 원년 — 측천무후가 황제로 있던 해 — 신수는 이미 95세였다. 무후는 특사를 보내 그를 수도로 초대했다. 이듬해 그는 낙양에 도착했고, 무후는 군신의 예를 내려놓고 친히 그 앞에 무릎을 꿇어 예를 올렸다. 대사가 법을 설하실 때는 가마에 모시고 황궁 전당으로 들어갔고, 무후는 직접 신하들을 거느리고 그 곁에 무릎을 꿇고 설법을 들었다.
훗날 당 중종은 그에게 더 큰 존경과 예우를 베풀었다. 이 무렵 신수는 여러 차례 고향으로 돌아가 은퇴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으나, 황제는 진심으로 제자처럼 여기며 "내 마음은 오직 부처를 받드는 데 있고, 대사의 가르침을 쉼 없이 듣고 싶을 따름이다"라고 답했다. 그는 떠날 생각을 버려 달라며 거듭 간청했고, 결국 신수는 머물러 낙양과 장안에서 널리 법을 전했다. 그는 "양경의 법사, 삼조의 국사"로 불리게 되었다. 신룡(神龍) 2년 2월 낙양 천궁사에서 열반에 들었다. 황실의 공주와 부마가 추모 문집을 지었고, 조정에서는 그에게 시호를 "대통선사"로 내려주었는데, 이는 선종 사상 최초로 황실로부터 이런 존예를 받은 인물이었다.
대사는 평생 황실의 극진한 존경을 받았으나, 결코 교만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중종에게 혜능 대사를 수도로 초대할 것을 건의했다. 《전등록(傳燈錄)》에 따르면 신수의 제자들은 자주 혜능을 조롱하곤 했다. "글자도 하나 읽지 못하는 자가 무슨 깨달음이 있겠느냐"며 비웃었다. 그러나 신수는 그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혜능 대사는 스승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으셨다. 최상승을 깊이 체득하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과 비교할 수조차 없다. 더구나 나의 스승이신 제5조께서 친히 그분에게 가사와 법을 전하셨는데, 그 일이 어찌 가벼웠겠느냐. 내가 직접 그분을 찾아가 배우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따름이다. 나는 그저 이곳에 남아 나라의 은혜를 헛되이 받을 뿐이다. 너희는 나와 함께 여기에 머물지 말고 조계로 가서 육조를 뵙고 가르침을 받아라. 돌아와서 대사께서 어떻게 법을 설하시는지 내게 전해주어라." 이를 통해 신수가 얼마나 겸손했는지, 그리고 육조의 선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존경했는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