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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철 스님의 간략한 소개

명철 장로(長老)는 호(號)가 일경(日敬)이고, 세속명은 장옥상(張玉祥), 법명은 운상(雲祥)으로, 1925년 3월 산둥성(山東省) 제남(濟寧)에서 출생하셨다. 일곱 살에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어머니와 함께 채식을 실천하고 불법을 배웠으며, 사서오경(四書五經)에 통달하셨다. 집안이 가난하여 열다섯 살에 학업을 그만두었다. 출가할 마음을 품고 있었으나 당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승향(萬勝祥) 유리점에 도제로 들어갔다.

명철 스님의 간략한 소개

명철 장로(長老)는 호(號)가 일경(日敬)이고, 세속명은 장옥상(張玉祥), 법명은 운상(雲祥)으로, 1925년 3월 산둥성(山東省) 제남(濟寧)에서 출생하셨다. 일곱 살에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어머니와 함께 채식을 실천하고 불법을 배웠으며, 사서오경(四書五經)에 통달하셨다. 집안이 가난하여 열다섯 살에 학업을 그만두었다. 출가할 마음을 품고 있었으나 당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승향(萬勝祥) 유리점에 도제로 들어갔다.

명철 장로(長老)는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全國人民政治協商會議) 위원, 중국불교협회 상무이사, 산둥성불교협회 명예회장, 산둥 잠산(湛山)불교학원 원장, 청도(靑島)불교협회 회장, 청도 잠산사 주지 등을 역임하셨다. 근년(近年)에 명철 주지의 지도 아래 잠산사는 꾸준히 건축 및 조경 사업을 확장해 왔다. 법당과 경장(經藏), 약사원(藥師園)의 담장·문루(門樓)·대문 등이 모두 중수되고 확장되어, 이 지역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명철 주지는 한평생의 정력을 중국 불교 사업에 바치셨으며, 잠산사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다.

명철 스님의 생애

어린 시절

1925년 3월, 명혜 스님은 산둥성 지닝(濟寧) 발리잉(八里營)의 농경과 학문을 함께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외할머니와 부모님은 모두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아버지는 성실하고 마음씨 좋은 분으로, 평생 땅을 일구고 채소와 멜론을 기르며 집을 짓는 일에 종사하셨고, 이웃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으셨다. 마흔에 아들을 얻고 크게 기뻐하시며, 그 아이의 학명을 장유향(張玉湘, 명혜 스님의 세속 이름)이라 짓고, 자(字)를 운호(雲浩)라고 지어주셨다. 아이의 평생 건강과 안녕을 빌기 위해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절에 가서 노스님께 젖이름을 지어달라고 청했다. 노스님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이 아이는 불교와 인연이 깊으니 '대승(大僧)'이라 부르세."

두 살 때 유향은 몸에 꽉 끼는 옷을 입으면 울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무슨 옷을 입고 싶으냐고 물으니, 작은 손으로 헐렁하고 흘러내리는 승복을 입고 싶다는 듯 손짓했다. 어머니가 작은 승복을 지어 입혀주니, 유향은 너무 기뻐서 도무지 벗으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며 한마디 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이 아이가 장차 승려가 되려는 것은 아니겠지?" 늦게 아들을 얻은 부모는 유향을 애지중지하면서도 함부로 키우지 않았다. 특히 어머니는 교육에 엄격하셔서, "네 살 공융이 배를 사양한 이야기" "악비(岳飛)의 나라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 같은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어, 어린 유향의 마음에 효도, 나라 사랑, 국가에 봉사하는 이상을 심어주셨다.

유향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네다섯 살 때 이미 《삼자경》, 《백가성》, 《천자문》을 유창하게 암송할 수 있었고, 일곱 살에 마을 서당에 입학하자, 총기로 스승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다른 학생들보다 더 많고 어려운 과제를 맡았는데도, 항상 가장 먼저 가장 잘 해냈다. "여덟 살 신동"으로 불리던 장유향은 발리잉 일대에 명성이 자자했다.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중병으로 침상에 누우셨다. 농사하며 모은 아버지의 저축은 거의 다 치료비로 쓰였지만, 병세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 무렵 서당에서는 등록금으로 밀 한 와 수수 한 를 내야 했다. 학식과 기품을 갖추신 어머니는 아들이 학업을 중단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이 굶고 치료를 포기하는 쪽을 택하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허약한 몸을 이끌고 친정에 가서 밀 한 를 빌려 등록금을 마련하셨다. 지금도 명혜 스님이 이 일을 말씀하실 때면,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존경과 감사가 절로 흘러나온다. 넉넉지 못한 살림과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형편은 오히려 유향을 더욱 열심히 공부하게 만들었다. 매일 새벽이면 일어나 두 길의 서당까지 걸어 다녔고, 성적은 항상 최고였으며, 부모님과 친척들의 자랑이었다.

열 살 때 유향은 중병에 걸린 어머니의 약을 구하러 절에 갔다. 뜻밖에도 노스님이 점괘가 담긴 대나무 통을 건네시며, 진심으로 한 개를 뽑아보라 하셨다. 점괘에는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의아한 마음에 점괘를 뒤집어 보니, 뒷면에 "아들이 대승(大僧)이니, 치료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을 것이다"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더욱 혼란스러웠지만 유향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다. 그 뒤로 어머니는 약을 드시지 않았고, 모자가 함께 대자비다라니를 암송하며 축복받은 물을 마셨다. 2년 동안 침상에 누워 지내시던 어머니가 3개월 만에 한 방울의 약도 쓰지 않고 완쾌되어, 다시 밭으로 나가실 수 있게 되었다. 유향의 불심은 한층 더 깊어졌고, 이 은혜에 보답하고자 부처님께 "평생 채식하고 다시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서원을 올렸다.

열세 살이었던 유향은 같은 문중의 독실한 재가 불교 신자 장보창(張寶常) 할아버지와, 보창의 손자이자 자신의 학우인 장우진(張玉珍)과 함께 보제사(普濟寺) 법회에 참석하러 갔다. 그곳에서 인고(印固) 주지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는데, 주지는 《정토문(淨土門) 수행 권면(勸修)》 한 권을 꺼내 유향에게 보여주었다. 첫 장을 넘기자, 고요하고 자비로운 한 스님의 법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즉시 그 인물과 깊은 인연을 느끼며 경외와 흠모로 가득 찼고, 그 이름을 마음 깊이 새겼다. 바로 원영(圓瑛) 대사로, 당시 중국에서 가장 학식이 높고 존경받던 불교 대사였다.

사십 분 정도가 지난 뒤, 유향은 책을 주지에게 돌려주며 한 글자도 빠짐없이 전부 외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인고 주지가 시험해 보니,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크게 놀란 주지는 유향이 만약 불문에 들어선다면 틀림없는 법기이며, 승가에서 보기 드문 인재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유향은 그제야 그동안 마음속에 품어왔던 소원을 인고 주지에게 털어놓았다. 출가해 원영 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주지는 흔쾌히 두 사람의 이름을 적어 원영 대사께 보내, 함께 귀의할 수 있도록 해주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유향과 장우진은 같이 원영 대사에게 구족계를 받으러 가자고 약속했다. 이튿날 새벽에 출발하기로 하고,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그날 밤, 우진의 가족이 두 사람의 계획을 알아채고 그를 심하게 때려 걷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했다. 우진의 가족은 그의 누이에게 유향에게 이 사실을 전하라고 보냈다. 우진은 걸을 수 없게 되어 갈 수 없으니 본인도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원래 고집이 센 유향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이튿날 이른 아침, 그는 마른 식량과 조금씩 모아 둔 저금만 챙겨 길을 떠났다. 마을에 있는 옥로사(玉露寺)를 찾아가 정현(正賢) 스님께 원영 대사를 뵐 수 있는 곳을 여쭈었다. 스님은 현재 베이징에서 법문을 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유향이 베이징까지 가는 길을 다시 여쭈니, 스님은 "그냥 계속 북쪽으로 가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대화를 나누는 도중 정현 스님은 유향이 몰래 집을 나왔다는 것을 알고, 그를 하루 동안 머무르게 하시는 한편 가족에게 소식을 보내셨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가 급히 달려와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를 두 대 때리고 집으로 데려갔다. 유향은 한동안 시무룩했지만 출가하려는 뜻을 버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보시고 이렇게 타일르셨다.

"먼저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학업을 마치렴. 학문이 없으면 원영 대사께서 너를 제자로 받아주지 않으실 거야."

유향은 어머니의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한때는 다시 공부에 매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영 대사께서 편지를 보내 유향에게 *혜염(慧然)*이라는 법명을, 장우진에게는 *혜해(慧海)*라는 법명을 내려주셨다.

청년 시절

열네 살 되던 해, 가족은 그의 학비로 내야 할 밀 네 (斗)와 수수 두 를 더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욕향(玉祥)은 도시에 있는 숙부의 잡화점으로 가 일을 하면서, 배달을 하는 틈틈이 홀로 공부를 이어갔다. 날마다 긴 시간 일하며 손님들의 물건과 나무상자를 날랐다. 매서운 겨울에도 얇은 겨울옷 한 겹뿐이었고, 끼니를 거르는 날이 잦았으며, 갈라진 손금에서는 피가 멈추지 않았다. 1년 뒤, 설을 맞아 집에 돌아갈 즈음 숙모(叔母)는 그에게 양말 한 켤레와 위안(元) 한 닢만을 건넸다. 욕향은 한 점 불평도 품지 않았다. 그를 조용한 자부심으로 채워 준 것은, 이 모진 고난 속에서도 지난(濟寧) 고등학교 졸업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기로 마음먹은 욕향은 지난(濟南)의 백마산(白馬山)으로 가 고된 육체노동에 뛰어들었다. 곡식 자루를 나르고 지하 창고에서 술 통을 끌어내는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난(濟寧)의 '성제서양약방(成濟西藥房)'에 들어가 서양 의학을 배웠다. 부지런하고 배우는 것이 빨라, 의술과 업무 능력이 빠르게 늘어 동료들의 칭찬을 받았다. 당시 원장은 가톨릭 신자였는데, 한 번은 욕향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며 그를 꿇어앉혔다. 욕향은 부처님께 세운 서원을 깨뜨리느니 차라리 기꺼이 무릎을 꿇었다.

이 무렵 욕향은 이미 셀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을 겪었다. 스스로를 거친 바다 위의 작은 배처럼 느꼈고, 삶은 언제든 뒤집힐 위험에 처해 있었다. 세상 만물의 무상함이 그의 마음을 움직여 부처님을 찾고 속세를 떠나 출가 수행하고자 하는 갈망을 일으켰다. 갖은 어려움 끝에 마침내 상하이(上海)의 원명강당(圓明講堂)에 이르러, 어려서부터 존경해 온 원영(圓瑛) 노스님을 뵙게 되었다. 맏상좌인 명양(明暘) 스님이 그에게 말했다. "노스님은 이제 연세가 많으셔서 더 이상 제자를 받지 않으신다." 이 말을 듣고 욕향은 다급하게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어려서부터 출가를 간절히 바랐으며, 열세 살에 원(圓) 스님 문하에서 귀의하여 법명(法名) *정(正)*을 받았고, 인연이 무르익어 이제야 비로소 노스님을 친견하게 되었다고. 욕향의 간절함과 뛰어난 자질에 감동한 원영 노스님은 그를 마지막 제자로 거두셨다.

명저 스님의 주요 행적

1948년 2월 8일, 상하이 원명강당에서 원영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셨습니다. 이후 푸저우 고산 용천사로 파견되어 출가 수행자인 사라만타가 되셨고, 원영 스님께서 법호로 ‘명저’, 자로 ‘리징’을 내려주셨습니다.

1950년, 푸저우 사리원에서 자주 스님을 계사로 모시고 삼계계(三壇戒)를 수지하시어 율장과 화엄종 교학을 공부하셨습니다.

1952년, 자주 스님을 모시고 샤먼 남푸묘사로 이동하시어 승가 감독으로 봉직하셨습니다.

1953년 봄, 상하이에서 경권 대스님 밑에서 천태와 화엄 교학을 배우셨습니다. 1954년 가을, 오대산 청량기향사로 가시어 능해 스님 밑에서 율장과 밀교를 공부하셨습니다.

1955년, 광지묘봉사 주지 정루 스님의 초청으로 화엄법회 부강사로 참가하셨습니다.

1956년, 중국불교학원 입학시험에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하시어 1959년 졸업하신 후 고향 성으로 배치되셨습니다.

1979년, 명저 스님은 중국불교협회 회장 조푸추와 부회장 진궈로부터 "중국불교협회에 주거하시며 법원사에서 업무를 재개하시라"는 지시 편지를 받으셨습니다. 그 시점까지 그는 30년 넘게 묵묵히 법을 연구해오셨으니, 이른바 "십 년을 갈아 한 검을 얻는다"는 말이 그를 두고 한 것이었다.

1980년, 수백년 전 일본에 건너간 당나라 감진 스님의 사리함이 중국으로 반환되어 의식 방문 행사가 열렸을 때, 명저 스님은 교토 절의 주지 모리모토 교준 노인과 함께 공양을 올리시고 경을 독송하시고 예배를 드려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끄셨으며, 중일 양국 민간의 불교 교류와 우호의 연대를 더욱 두텁게 했다.

1980년 가을, 중국불교학원이 재개된 후 학무 부원장 겸 강사로 임명되셨고, 중국불교협회 이사와 상임이사로도 봉직하셨습니다.

1984년, 중국불교협회 소재지인 광지사로 전임되셔서 좌석승으로 부임하시고 승가 훈련반을 설치하셨습니다. 조푸추 회장의 지도 하에 정기적으로 외교 업무를 보시며 일본, 프랑스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셨습니다.

1988년 6월 6일, 명저 스님은 칭다오 잔산사의 주지로 취임하셨습니다.

1994년, 일흔 살의 나이로 명저 스님은 사천-티벳 고원에 위치한 세르타르 불교학원에 두 번째로 방문하시어 밀교를 공부하셨습니다.

2012년 9월 16일 오전 6시 50분경, 팔십팔 세의 나이에 명저 스님은 잔산사에서 최후의 열반에 드셨습니다.

명저 스님의 게송

온갖 조건을 내려놓으니 몸이 가벼워지고,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니 모든 경계가 하나로 합쳐지니, 밝은 정적이 과거와 현재를 관통해 비추니, 생사와 열반이 모두 헛된 이름에 불과하니라.

몸을 바르게 하고 마음이 평온하니, 호흡이 고르고 부드러우며, 조건이 갖추어지되 머무르지 않아 먼지에 더럽히지 않으니, 모든 것을 공으로 보고 그 안에서 편안하니, 밝은 정적이 과거와 현재를 관통해 비추네.

선은 마음이요, 마음은 선이니, 선과 마음이 둘이 아니니 진정한 선이로다. 진정한 선은 본래 구할 곳이 없으니, 깨달으면 선 아닌 곳이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