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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거사 일성: 약전

원로 거사 일성(1926 – 2017년 12월 21일), 속성은 주(周), 속명은 운생(雲生)이며, 호남 왕성(望城) 출신이다. 향년 91세로 입적하신 후 다비(荼毗, 화장)를 치르시고 600여 점의 성스러운 사리(śarīra)가 회수되었다. 일성 거사는 강서성 불교협회 회장, 중국불교협회 부회장, 중국불교원 원장, 중국불교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수많은 직책을 두루 역임하셨다. 평생 애국자이시며 불법의 헌신적인 수행인이...

원로 거사 일성: 약전

원로 거사 일성(1926 – 2017년 12월 21일), 속성은 주(周), 속명은 운생(雲生)이며, 호남 왕성(望城) 출신이다. 향년 91세로 입적하신 후 다비(荼毗, 화장)를 치르시고 600여 점의 성스러운 사리(śarīra)가 회수되었다. 일성 거사는 강서성 불교협회 회장, 중국불교협회 부회장, 중국불교원 원장, 중국불교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수많은 직책을 두루 역임하셨다. 평생 애국자이시며 불법의 헌신적인 수행인이셨고, 법을 널리 전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평생 사명으로 삼으시며 두타(頭陀)의 정진 수행 정신을 몸소 실천하셨다. 그는 전 세계 사문(沙門)과 신도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으셨다.

주요 인생 사건

1949년 6월, 일성 거사는 출가하여 승가계를 수지하셨다.

1956년 겨울, 선종의 거조 설운(虛雲) 어른이 친히 일성 거사의 계사(戒師)를 맡으셔서 남화사(南華寺)에서 구족계를 수지하셨다. 이후 운구산(雲居山)으로 돌아가 엄격한 개인 수행에 정진하셨다. 이듬해 인연이 성숙하자, 설운 어른이 친히 전법식을 주재하시고 자신의 법문을 이은 제자이자 당시 진여선원(眞如禪院) 주지이신 행복(幸福) 거사로 하여금 일성 거사에게 법안(法眼) 전수를 내려주시며, 법명을 연심(演心)이라 하시고 계양종(溈仰宗) 제10대 법손이라 칭하셨다. 같은 해, 설운 어른은 또한 친히 계단의 계사로 홍콩 광범(寬範) 거사를 대신하여 임제종(臨濟宗)의 법통을 전수하시고, 일성 거사에게 장묘(昌妙)라는 법명을 내려주셨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일성 거사는 설운 어른이 운영하고 해등(海燈) 거사가 가르치는 불학연구원에서 수학하시며 수행이 날로 깊어지셨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일성 거사는 사원에서 쫓겨나 강제로 운구산 개간농장(雲居山墾殖場)의 농부로 전근(轉配)되어 일하게 되셨다.

1978년 말, 일성 거사는 운구산 옛 지서전(至述堂) 선원 자리에 가장 먼저 돌아가 승가생활을 재개하셨다. 이듬해 봄, 진여선원(眞如禪院)에 거처를 마련하시고, 곧 선원 운영위원으로 선출되어 객사(知客)에 임명되셨다.

1985년 가을, 진여선원의 주지로 취임하시어 이 선조(先祖)들의 선찰(禪刹)을 복원하는 사업을 시작하셨다.

1986년, 일성 거사는 용수현(永修縣) 불교협회 회장과 강서성 불교협회 회장을 겸임하셨다.

1987년에는 구강시(九江市) 불교협회 부회장의 직책도 맡으셨다. (이외에도 중국불교협회 부회장, 강서성 불교협회 회장, 강서성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政協) 위원, 구강시 정치협상회의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셨다.)

2002년 9월, 원로 거사 일성은 중국불교협회 회장과 중국불교원 원장에 신임 선출되셨다. 법을 널리 전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을 핵심 사명으로 삼으시며 두타(頭陀)의 정진 수행 정신을 몸소 실천하시어, 전 세계 사문(沙門)과 신도들에게 존경과 추앙을 받으셨다.

2010년, 원로 거사 일성은 회장직에서 물러나 중국불교협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시게 되셨다.

원로 거사 일성은 2017년 12월 21일 오전 1시 36분에 강서 구강시 운구산 진여선원에서 평안하게 적멸(입적)하셨다. 향년 91세, 출가 68년, 구족계를 수지하신 지 61년이셨다.

생애의 여정과 공헌

1. 출가와 엄한 수행

의성스님은 1926년 후난성의 농가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채식을 하셨습니다. 집안이 가난해 열 살 되기 전 아버지께서 석공 기술과 기초 건축 기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0대 중반에는 친구들과 가족을 따라 인근 오산사에 자주 다니며 향을 피우고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 스님께 삼보에 귀의하시고 그 스님의 지도 아래 정토 수행을 시작하셨습니다.

1948년 어느 날, 오산사 대전에서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계실 때, 의성스님은 화려한 불상이 가득한 전각 안에서 각 불상 앞에 밝게 타는 촛불이 녹아 눈물처럼 불상의 옆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 저도 모르게 시를 읊조리셨습니다:

"오늘 나는 다른 생각 없이 와서 옛 부처님께 절을 올리나니… 오산사는 안개에 싸여 멀리 자리하였고, 그 빛은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비추는구나."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놀라 스님께서 오래전부터 법을 구하는 깊은 서원을 품고 계셨으며, 선근이 이미 성숙하셨다고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그중 한 법형 스님은 “스님은 선 수행을 위한 인과의 선근과 타고난 지혜를 가지셨으니, 선을 배우시면 반드시 뛰어난 수행자가 되실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스님의 귀의 스승은 곧 수행 방식을 선으로 바꿀 것을 권하셨습니다.

그해 6월, 의성스님은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하고 후난성 장사현 황금화원진(현재 왕성현)에 있는 서심암으로 향해 명심스님을 계사로 모시고 머리를 깎으시어 정식으로 출가하셨습니다. 임제종 선의 법맥을 이어받으시어 법호는 의성, 자는 무연을 받으셨습니다. 그 이후 몇 년간 명심스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법과 승가의 규율을 배우시고, 금강경에 집중적으로 연구하시며 수행이 크게 깊어지셨습니다.

1956년 여름, 의성스님은 근대 최고의 선종 대사이신 허운스님이 강서성 용서현 운거산에 머물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 그를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기 위해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해 겨울, 허운스님께서 직접 계사가 되어 주셔서 광둥성 남화사에서 구족계를 받으셨습니다. 운거산으로 돌아가신 후 엄격한 수도 생활에 전념하시며 백장스님의 유명한 가르침인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말씀을 성실히 따르셨습니다. 그러한 근면함으로 허운스님께서 높이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스님은 흔들림 없이 정진하시며 진실하고 실천적인 화두 참구 선 수행을 이어가셨습니다.

한편 진여선사의 복원·재건 과정에서 의성스님은 건축 계획, 설계, 시공 감독을 총괄하시어 허운스님과 행복스님 두 분의 깊은 존경을 받으셨습니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스님은 개인 수행에 전념하시는 한편, 가능한 한 자주 허운스님을 찾아뵙고 직접적인 개별 지도와 엄격한 훈련을 받으셨습니다. 불경을 깊이 연구하시고 허운스님께서 운영하시는 불교연구아카데미에 등록하시어, 해등스님께서 강의하시는 수업을 들으시며 수행을 더욱 심화하셨습니다. 이 기간 동안 스님은 세속 교육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시는 한편, 허운스님의 서간, 시, 원고를 정리하는 일을 맡으셨습니다. 1959년 5월까지 허운스님의 저서 5대권을 편찬하셨습니다.

2. 법맥을 잇고 인재를 육성하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 동안, 일성 스님은 사찰에서 쫓겨나 운거산(雲居山) 개간농장에서 강제로 농장 노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깊은 산중에서 대나무를 쪼개는 일을 했고, 이후 소를 모는 일로 배치되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운거산 도로 공사 현장에서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심을 잃지 않았고, 승려로서의 계율을 엄격히 지켰으며, 혼자 있을 때는 몰래 채식을 유지하며 일과 독경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1978년 말, 일성 스님은 체광(體光) 스님 등 동료 수행자들과 함께 운거산 지수당(祇樹堂) 선사 옛 터로 가장 먼저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무성한 풀을 베고 대나무를 쪼개어 초막을 짓고, 승가의 생활 방식을 되찾았으며, 불교 의식을 다시 거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봄에는 진여(眞如) 선사에 남아 있던 대중과 합류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성 스님은 사찰 관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지객(知客)을 맡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사찰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허운(虛雲) 스님의 탑부터 복원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정식 승인을 받고자 베이징으로 올라가 당시 중국불교협회 회장이었던 조보초(趙樸初)로부터 이를 허락받았습니다.

1985년 가을, 일성 스님은 진여 선사의 주지로서 방좌(昇座)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스님은 “부처님의 일을 잇는 것은 마음의 등불을 밝히는 것이요, 법을 펴는 것은 승가의 첫째 가는 본분이다”라는 원칙을 세우고, 이 조정(祖庭)을 다시 일으키는 것을 핵심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사찰을 운영함에 있어 스님은 과거 선종 조사들의 유훈과 현시대의 요구를 두루 존중했으며, 불교의 가르침과 세간의 법률을 아울러 지켰습니다. 대중의 안거(安居)와 신심을 안정시키고, 나태함과 해이함을 없애며, 계율을 엄격히 지키는 데 주력했습니다. 이를 위해 『진여사 상주 규약(眞如寺常住規約)』과 『객당 규약(客堂規約)』 등 일련의 규정을 제정하고, 솔선수범하여 이를 꼼꼼히 따랐습니다. 일성 스님의 인도 아래 진여사 대중은 허운 스님이 주지로 있던 시절에 자리 잡았던 엄격한 수행 전통을 정성껏 되살리고 한층 확장했습니다. 대중은 매일 아침저녁 예불을 올렸고, 음력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포살(布薩) 의식을 거행했으며, 좌선과 삼매(三昧) 수행을 정진했습니다.

1990년에는 1,000제곱미터가 넘는 새 선당이 완성되었습니다. 깊은 수행을 뒷받침하기 위해 장기 좌선에 참여하는 스님들의 수를 늘리고, 하루 좌선 횟수를 네 차례에서 열네 차례로 확대했습니다. 사찰에서는 해마다 여름 법문과 겨울 7일간의 선칠(禪七) 결제(結制)를 열었는데, 사찰 내 대중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재가 및 출가 수행자들이 참석하고자 발걸음을 했습니다. 일성 스님은 또한 백장(百丈) 스님의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유명한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대중을 이끌고 직접 농사일에 참여했습니다.

1985년부터 일성 스님은 허운 스님 기념관과 서선당(西禪堂), 방장(方丈)을 비롯해 행복(行福)·해등(海燈)·랑요(朗耀) 스님의 부도와 묘 설계 및 건축을 직접 총괄했습니다. 또한 관형(觀衡)·계현(戒賢) 등 역대 조사들의 부도와 묘 복원에도 앞장섰습니다. 사찰 내 모든 전각과 누각이 완전히 복원되었고, 수백 점의 불상이 새로 주조되어 금박을 입히고 채색되면서 신성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일성스님은 청년 승려들의 교육과 수행을 매우 강조하셨습니다. "반야당에서 무위를 배우고 마음의 참된 자성을 깨닫는 것이 참된 목적"이라는 핵심 원칙을 따르도록 이끌었으며, 『금강경』을 비롯한 핵심 경전 연구를 심화하도록 격려하셨습니다. 『금강경』의 "어디에도 머무르지 말고 마음을 일으키라"는 가르침을 굳게 붙들고, 늘 경계를 잃지 않으며 세속의 집착에 물들지 말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티끌마다 참 본성과 서로 어울리고, 찰나마다 지혜의 구름에 이른다"는 원리를 강조하시며, 참선 수행자가 먼저 덕 있고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참선 수행은 일상적인 일과 활동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 곧 참선이란 형식적인 절차만 좇는 것이 아니며 흙을 파고 물을 나르고 농사짓는 일도 모두 참된 수행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1987년, 일성스님은 사찰 승려들을 위한 연수 과정을 마련하셨습니다. 이듬해에는 광저우 광효사(光孝寺) 제1좌였던 본지(本智) 법사를 사찰로 특별히 모시고 경전 강의를 진행하셨습니다. 1992년에는 진루사(眞如寺)에서 강서성 불교협회가 개최한 승가 행정 연수 과정을 적극 후원하셨고, 직접 "사찰 승가 규범"에 관한 강의를 하셨습니다.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진루사의 청년 승려 전원이 청강하도록 배정하여 식견을 넓혀주셨습니다.

불교의 법맥을 이어가고 다음 세대까지 법등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일성스님은 1985년, 1988년, 1991년 세 차례에 걸쳐 삼壇대계(三壇大戒) 수계 법회를 주재하셨으며, 만 명이 넘는 수행자들이 구계를 받았습니다. 1989년 가을에는 선화(宣化) 법사의 초청으로 "중국 불교 미국 포교 선교단"의 일원으로 미국 만불성으로 건너가 대규모 수계 법회에 증사로 참석하셨습니다.

3. 불교 진흥과 법 전파

진루 선원(眞如禪院)을 이끄는 데 전념하셨던 것과 함께, 일성스님은 강서 지역 불교 진흥에도 크게 이바지하셨습니다. 1986년 용수(永修)현 불교협회 회장과 강서성 불교협회 회장을 겸직하셨고, 1987년에는 구강시(九江市) 불교협회 부회장을 맡으셨습니다.

핑샹(萍鄉), 푸저우(撫州), 상라오(上饒), 난창(南昌) 등지의 사찰 복원을 지원하기 위해, 일성스님은 60대의 나이에도 이곳저곳을 두루 다니며 그 사업을 후원하셨습니다. 강서성 이펑(宜丰)현의 동산 보리사(東山普利寺), 광펑(廣丰)현의 보산 능참사(博山能禪寺), 첸산(鉛山)현의 콩퉁산 자이사(慈濟寺) 등 주요 조동종(曹洞宗) 도량의 명예 주지로 초빙되셨습니다. 복원을 위한 방향을 제시하고 실질적으로 힘을 보태셨으며, 직접 건축 설계까지 작성하시고 시공을監督하시기도 했습니다.

일성스님은 불교 문화 사업의 발전을 매우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운구산(雲居山) 신현지(新縣志)』의 편찬 사업을 직접 주도하셨으며, 70만 자가 넘는 분량의 저작을 완성하기 위해 3년간 헌신적으로 힘쓰셨습니다. 허윈(虛雲) 선학 연구의 진흥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셨고, 상하이 화동사범대학교의 장저저(張哲哲) 교수가 편찬한 『허윈대사 선학사상의 정수(精髓)』(1·2권)의 출판에 원고를 기고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표창과 수상

2013년, 일성스님은 공자 평화상을 수상하셨습니다.

2013년 12월 9일 오후, 제4회 공자 평화상 시상식이 베이징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일성스님의 수상에 관한 공식 공로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 불교협회 회장 재임 기간 중 중국 불교의 개혁과 발전에 남다른 공헌을 하심으로써 조직에 새로운 생명과 활력을 불어넣으셨으며, 특히 2008년 12월 명예 회장으로 선출된 이후 전 세계에 걸쳐 법을 널리 전파하고 중생을 제도하며, 자비와 지혜를 하나로 합쳐 세계 평화의 사명에 귀중한 지침을 제공하심으로써 21세기 인류 평화의 역사에 길이 빛나는 기념비를 세우신 공로를 인정하여, 2013년 제4회 공자 평화상을 이에 수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