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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종 제11대 조사 성안 스님 — "가거가도다, 다시 오리라, 염불로 다시 만나리라"

음력 4월 14일은 정토종(蓮宗) 제11대 조사 성안선사(聖安禪師)의 기제(忌齋)입니다. 이 조사께서 세상에 머무신 시간은 짧아서 불과 49년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간절한 자비심과 언행일치(言行一致)의 가르침은 후세에 다함이 없는 법보(法寶)의 보화를 남기셨습니다. 이 글은 조사가 남기신 몇 편의 유문(遺文)을 모아, 일생의 주요 전환점들을 실마리로 삼아 동법대중에게 그 무량한 공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도록 소개합니다.

음력 4월 14일은 정토종(蓮宗) 제11대 조사 성안선사(聖安禪師)의 기제(忌齋)입니다. 이 조사께서 세상에 머무신 시간은 짧아서 불과 49년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간절한 자비심과 언행일치(言行一致)의 가르침은 후세에 다함이 없는 법보(法寶)의 보화를 남기셨습니다. 이 글은 조사가 남기신 몇 편의 유문(遺文)을 모아, 일생의 주요 전환점들을 실마리로 삼아 동법대중에게 그 무량한 공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도록 소개합니다.

勸發菩提心文』에서 발췌

나는 부처의 아들이지만 부처님의 은혜를 보답하지 못한다. 속으로는 자신에게 이로움이 없고, 밖으로는 남에게 이로움이 없으며, 살아서는 세상에 이로움이 없고, 죽은 뒤에는 후세에 이로움이 없다. 하늘은 높으나 나를 덮어 주지 못하고, 땅은 두텁으나 나를 실어 주지 못한다. 누구가 나보다 더 무거운 죄인이겠는가? 견딜 수 없는 슬픔에 짓눌려, 의지할 곳이 보이지 않으나, 한 순간 초라한 부족함을 내던지고 문득 위대한 보리심을 일으킨다. 비록 이 시대에 불법의 쇠퇴를 되돌릴 수는 없으나, 미래 생에 참된 법을 굳게 받들겠다고 결심한다.

1719년(강희 58년) 봄, 34세의 성안조사(聖安祖師)는 항주(杭州) 서릉(西陵)에서 강을 건너 영파(寧波) 사명(四明)의 아욕왕산(阿育王山)으로 부처의 사리가 모셔진 탑에 참배하러 갔다. 몇 달 전, 그는 30세에 짓기 시작한 정토시 30수를 증보하고 다듬어 108수의 시집 『정토행권진시(淨土行勸進詩)』로 엮어 공식 출판하고 널리 유포했다. 이 증보 시집의 완성은 스님의 정토 사상이 성숙해 가는 과정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참과 정토, 자력과 타력, 명호수행과 관상수행 같은 교리적 대조에 대한 핵심적인 논술—이후 『서방발원해(西方發願解)』와 『해신발원해(海神發願解)』 등 정토 저술에 펼쳐질 내용—이 이미 이 시들에 담겨 있었다.

강을 건너 산을 넘는 길의 봄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스님이 잠시라도 멈추게 만들지는 못했다. 아욕왕사에 도착한 날, 탑 앞에서 참배하던 한 비구(比丘)를 만났다. 그 비구는 탑 앞에서 84,000배의 전배를 완수할 뜻임을 밝혔다. 두 사람은 즉시 뜻이 맞아, 성안조사는 기꺼이 함께했다. 매일 함께 탑에 참배하고, 승가(僧家)의 의례를 행하며, 나란히 수행하고, 그곳에서 하안거(夏安居)를 지냈다. 석 달 뒤, 스님은 사리탑 앞에서 손가락 하나를 태워 공양을 올리고 『예탑기(禮塔記)』라는 제목의 시 여덟 수를 지었다. 그중 한 수는 이러하다.

석가모니 부처님 입멸하신 지 이천 년, 사리는 오늘날까지도 찬연히 빛나고 있다. 과거 생에 쌓은 선근(善根)을 다행으로 여겨, 사리탑 앞에 빛나는 상(相)을 우러러본다.

이 시는 탑에 참배하던 중 스님이 사리가 빛을 발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적고 있다. 일생 동안 스님은 부처님께 다섯 차례 손가락과 향을 태워 공양을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님은 항주의 영복사(永福寺)로 옮겨가 수륙재(水陸齋)에 참여했다. 재중 동료 승가와 함께 부처님께 공양할 일을 의논하면서, 이 말세에 많은 승려와 비구니들이 부처님의 입멸일에 슬퍼하거나 공양을 올리지 않으며, 어떤 이들은 부처님의 입제일(入寂日)조차 모른다고 한탄했다. 이에 이듬해에 부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입멸 공양 법회를 열기로 결심했다. 그 자리에서 여러 사람이 스님의 공양 법회 조직을 돕기로 결의했다.

1720년(강희 59년) 2월 15일, 스님은 약속을 지키고 다시 아욕왕산으로 돌아가 사중(四衆)을 이끌고 칠일간의 정식 입멸 법회를 열었다. 잘 알려진 『발보리심문(勸發菩提心文)』이 이 법회에서 집필되었다. 이 글에서 스님은 여덟 가지 보리심과 그것을 일으키는 열 가지 인연(因緣)을 자세히 논하여, 사중(四衆)이 모두 보리심을 발하고 여래의 참된 법을 받들도록 권했다.

《보리심 발기를 권하는 글》에서 발췌

염불은 마침내 부처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위대한 보리심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어찌 염할 수 있겠습니까? 보리심을 발하는 것은 마침내 도를 행하기 위함입니다. 정토에 왕생하지 못한다면, 마음을 일으킨 뒤라 해도 쉽게 퇴전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보리심의 종자를 뿌리고, 부처명 염불의 쟁기로 가꾸면, 도의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라. 위대한 서원의 배를 타고 정토의 바다로 들어가면, 서방 극락왕생은 반드시 보장됩니다.

경전은 모든 현상이 마음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며, 마음 또한 조건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고정된 변하지 않는 본질이나 형상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한 생각의 분노가 중생을 지옥도에 빠뜨리고, 한 생각의 자비가 부처의 국토를 정화합니다. 품은 서원이 곧 그 마음을 빚어냅니다. 이러하듯 퇴전 없이 부처의 도를 행하려면, 보살들은 반드시 서원에 마음을 토대로 삼아 확고한 서원을 세우고, 보리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부처의 진정한 아들이라 일컬음 받을 수 있으며, 자신의 수행이 모든 중생의 해탈과 완전한 깨달음의 성취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정토 법문도 다를 바 없습니다. 아미타불의 사십팔대 서원은 보리심의 완전한 표현이며, 마음의 정토와 본성의 아미타는 보리심의 힘으로만 온전히 드러납니다. 이로써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 깨달음의 가장 근본적인 첫걸음이고, 보살도를 행하는 것이 부처가 되기 위한 유일한 길이며, 이 한 생에서 보리심을 성취함이 곧 정토 왕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님은 29세에 "누가 부처의 명호를 염하는가?"라는 화두(話頭)로 관조에 들어가셨습니다. 불과 네 달 만에 마음의 참된 본성을 깨닫고 "이제야 꿈에서 깨어났다"라고 외치셨습니다. 깨달음 이후 3년간 폐관(閉關) 수련을 이어가시며 정토 수행에 전념하셨습니다. 35세에 피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려 《보리심 발기를 권하는 글》을 짓셨으니, 이 글은 서두에서 보리심을 일으키고 확고한 서원을 세울 필요성을 힘주어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곧 이 글이 부처님의 마음과 조사들의 조맥(祖脈)을 계승하고 천명하는 동시에, 스님의 자비로운 수행과 검증된 깨달음의 열매임을 드러냅니다.


《네 수의 즉흥시(即興詩)》중 하나

무용한 몸, 깊은 산중에 머물 뿐, 허름한 방 하나, 홀로 들어가 문을 닫네. 세상에 전하는 말이 있으니 나를 부르지 말라, 이 한 생 다시 인간 세상에는 발을 들이지 않으리라.

옹정(雍正) 6년(1728년), 스님은 43세로 계획하신 10년간의 입멸회 가운데 1년이 남았고, 입적까지는 6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 조사는 세속과 출세간의 시련을 두루 겪으셨으며, 수행이 깊어지고 덕이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용신(龍神)과 천신(天神)의 가호를 받아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셨고, 강소(江蘇)·절강(浙江) 일대에 명성이 널리 퍼져 학인들이 줄지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고 인도를 받았습니다. 법을 활발히 펼치시면서도 스님은 스스로의 수행을 위한 겨를이 없다고 느끼셨기에, 항저우(杭州)의 선림사(仙林寺)로 은거하시어 다시는 그곳을 떠나지 않고 정토 수행에 전념하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이 시는 폐관 수련의 동기를 기록한 것으로, 스스로 무능함을 겸손히 내비치시며 깊은 산속의 초가집에 홀로 묻혀 수행할 수밖에 없다 하셨습니다. 세상에 부르지 말라 뜻을 전하시니, 이 한 생을 다하여 다시 인간 세상의 소란 속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마음이 드러나는 시입니다.

《즉흥시 사수》제4수

부서진 배는 빠진 자를 건지지 못하니, 이는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다. 온 힘을 다해 저쪽 기슭에 이르도록 힘써 나아가야 하리라. 배 타는 사람이 일단 육지에 오른 뒤에야, 새 노를 들어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리라.

산중으로 물러나 세상과 떨어져 사는 것은,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이상과 어긋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스님은 모든 중생을 온전히 구제하려면 먼저 정토 왕생(往生)의 큰 과업을 마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업(業)에 묶인 중생들은 마치 부서진 배 같아서, 스스로 겨우 떠 있을 뿐인데 어찌 다른 중생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 한 생애에 온 힘을 다해 먼저 해탈의 저쪽 기슭에 이르고, 그 뒤에 자비의 배를 돌려 깊은 지혜로 물 가운데서 떠내려가는 무량한 중생을 방편(方便)으로 제도해야 한다. 이는 용수(龍樹) 보살의 말씀, 곧 "생멸하지 않는 법의 인내(無生法忍)를 얻지 못하면, 이 탁세(濁世)에서 중생을 제도할 길이 없다"와 뜻이 맞닿아 있다.


정진당 편액(精進堂扁額)

마음이 통일되지 않으면 수행이 순수할 수 없고, 오직 졸음과 산란함이 여기서 번뇌를 자라게 하네. 이 堂(당)에 드나드는 모든 이에게 일러 둔다: 부지런한지 게으른지 스스로 자주 살피라. 게으르거든 분발하여 힘쓰고, 부지런하면 더욱 나아가라. 이 한 생애를 수행에 바치면 반드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보리라.

옹정(雍正) 8년(1730) 3월, 스님은 향년 45세였다. 신도들의 청에 따라 봉황산(鳳凰山) 범천사(梵天寺) 주지(住持)로 머무르게 되셨다. 동림도(東林道)의 법등을 이어 혜원(慧遠) 조사(祖師)의 풍을 본받아, 사중(寺中) 출가·재가 신도를 위한 정토도량(淨土道場)을 열고 정진당을 세우셨다. 그리고 《정진당 규칙》을 마련해 3년간 수행을 진행하며, 하루 수행을 20좌(座)로 나누었다. 그중 10좌는 불호를 송념(誦念)하고, 9좌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따른 관상(觀想) 수련을 하며, 1좌는 참회(懺悔) 의식을 행하도록 정하였다. 스님 자신은 범천사 서쪽 원(院)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자신의 거처를 *일촌향재(一寸香齋)*라 이름하시어, "도반(道伴)들이 함께 삼년 결사(三年結社)에 들어가니, / 문객(門客)을 위한 것은 다만 일촌(一寸)의 향(香)만 남았다"라는 시구로 그 결의를 드러내셨다. 즉, 귀한 손님이 찾아와 잠시 법담을 나누더라도 일촌의 향이 다 타면 다시 불호를 송념(誦念)하셨다는 뜻이다. 이로부터 세속의 모든 인연을 끊고 오로지 정토 수행에 전념하셨으며, 사람들은 그를 영명옹(永明翁)의 후신(後身)이라 일컬었다.

생의 마지막에 지은 게송

내 몸은 연꽃 속에 머물고 부처님 내 앞에 계시네, 부처님의 광명이 내 자금빛 연꽃을 비추시네. 내 마음 부처님 따라 정토에 왕생하리니, 오고 감이 없는 그 경지, 그 일이 온전히 드러나네.

삼 년 후, 스님은 폐관 수행을 마치셨다. 그해 음력 12월 8일,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도일에 스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내년 음력 4월 14일에 입적하리라.” 스님은 수개월 전부터 입적할 시점을 미리 알고 계셨고, 단지 왕생할 때만을 기다리고 계셨다. 이후 스님은 촌향암(寸香庵)에서 다시 폐관 수행에 들어가시어, 매일 부처님의 명호를 10만 번씩 외우셨다.

옹정 12년(1734년), 마흔아홉 살이 되신 성안 대사(聖安大師)는 생애 마지막 폐관 수행을 마치셨다. 음력 4월 12일, 스님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열흘 전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서방 삼성(Western Three Saints)을 보았고, 오늘도 다시 뵈었다. 내가 반드시 정토에 왕생하리라.” 그리고는 사원의 모든 일을 정리하신 뒤, 소식을 듣고 모여든 재가 신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셨다. 시중드는 제자가 작별 게송을 써달라고 청하자, 스님은 다음과 같이 적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연꽃 속에 있으며, 내 마음이 아미타부처님을 따라 정토에 왕생하노라. “오고 감이 없는 경지에서 그 일이 온전히 드러나느니라”는 구절은 오고 감이 없는 법성(法性)을 깨달으셨지만 왕생이라는 구체적인 일이 분명히 나타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천일의회(天衣義懷) 스님이 일러주신 “반드시 왕생하되 실로 가는 바가 없다(決定往生, 實無去者)”는 그 경지 그대로이다.

음력 4월 14일 새벽, 스님은 몸을 씻으시고 깨끗한 법의(法衣)로 갈아입으신 뒤 서쪽을 향해 눈을 감으시고 쌍과좌(雙跏趺坐)를 하셨다. 아침이 되자 멀고 가까운 곳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어 울며 스님께 애원했다. “부디 세상에 머물러 중생을 제도해 주십시오.” 스님은 눈을 뜨시고 대중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가지만 돌아오리라. 생사의 일은 지극히 중대하니, 너희 각자 마음을 정히 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외워라.” 말씀을 마치신 뒤 합장(合掌)하신 채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시며 입적하셨다.

스님은 강희(康熙) 25년 음력 8월 8일에 탄생하셨다. 향년 마흔아홉 살, 출가한 지 25년, 사원 주지(住持)로 계신 지 10여 년이었으며, 직접 출가를 인(引)하시고 계(戒)를 전하시며 귀의한 재가 신자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스님의 일생은 물에서 솟아오른 연꽃 같았고, 부처님의 본성에서 영원한 향기를 발산하셨다.

《권발보심문(勸發菩提心文)》의 마지막에 스님은 다음과 같은 훈계를 남기셨다. 만일 여러분이 진실로 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보심(菩提心)의 도반으로 인연을 맺게 될 것이요, 연사(蓮社)의 인연은 오늘부터 시작될 것이다. 바라건대 우리 모두 정토에 왕생하고, 모두 아미타 부처님을 뵙고, 모두 중생을 교화하며, 모두 원각(圓覺)을 성취하기를 기도하리라. 스님의 입적을 추모하는 오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공양과 추모는 바로 스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나는 가지만 돌아오리라”는 헛된 약속이 아니다. 바라건대 천하의 출가·재가 도인 모두가 참된 정진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외워 본래 마음과 묵묻히 합하되, 부처님의 명호 한 소리 한 소리마다 스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