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의 모든 수행 가운데 불호를 드리는 것이 가장 뛰어난 까닭은 무엇인가?
무량겁을 윤회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보내온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의 몸과 말과 뜻은 탐·진·치에 사로잡혀 끝없는 악업을 일으켜 왔습니다. 이 업이 만일 형체를 가졌다면 온 우주 공간으로도 담을 수 없을 만큼 광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무리 온 마음을 다해 참회하려 해도 온전히 소멸시킬 길이 없습니다.
무량겁을 윤회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보내온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의 몸과 말과 뜻은 탐·진·치에 사로잡혀 끝없는 악업을 일으켜 왔습니다. 이 업이 만일 형체를 가졌다면 온 우주 공간으로도 담을 수 없을 만큼 광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무리 온 마음을 다해 참회하려 해도 온전히 소멸시킬 길이 없습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무력함을 느낀다 해도, 과거의 업은 인연이 다하는 대로 흩어지게 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우리가 직접 붙잡아야 합니다. 다시는 이러한 악업을 짓지 않아야 하니, 이를 위해 우리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품고, 불호를 드리는 길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죄책감(慚)'과 '부끄러움(愧)'은 불교 논의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 개념입니다. '죄책감(慚)'은 과거의 잘못을 돌이켜 뼈를 깎는 듯한 뉘우침의 정을 스스로 내면에서 느끼게 하는 마음으로, 영어에서 말하는 guilt와도 비슷한 자기 반성적이고 내향적인 회한의 감정을 가리킵니다. '부끄러움(愧)'은 자신의 탐·진·치로 빚어진 행위가 남 앞에 드러날 때 얼굴이 달아오르는 수치심을 말합니다.
한 사람이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모두 갖추고 있다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앞으로 더욱 노력하여 나아갈 것입니다. 이전의 선하지 못한 행동에 뉘우침을 느끼고, 앞으로의 행동에서는 악을 멀리하고 선을 실천함으로써 스스로를 바로잡아 갈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수행의 훌륭한 기초가 되며, 불교에서는 이를 두 가지 선한 법 가운데 하나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르침은 어째서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일으키는 까닭에 마땅히 불호를 드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쌓인 무량겁의 악업을 소멸시켜야 함을 알면서도, 다른 참회 방법들은 이 무한한 악업을 없애기에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회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작법참회(作法懺悔), 이참회(理懺悔), 작상참회(作相懺悔) 등이 있지만, 그 모든 참회 방법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다름 아닌 불호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직 한 번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 전심으로 염불하면, 80억겁 동안 생사윤회 속에서 쌓인 모든 업의 죄를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어째서 불호를 드리는 것만으로 이토록 무거운 업의 죄를 소멸시킬 수 있으며, 참회의 모든 방법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에는 깊은 법리가 숨어 있습니다. 미혹한 마음으로 짓는 업은 아무리 무겁다 하더라도 그 본성은 실체가 없이 공空할 뿐입니다. 견고하고 실재한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업의 본성은 애초에 공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가 염불하는 부처님의 이름은 진여眞如 자체이자, 곧 부처님의 청정한 마음이자 찬란한 빛입니다. 우리가 짓는 모든 업은 미혹한 마음이 만들어낸 어둠 속에 존재합니다.
천 년 동안 캄캄한 방에 촛불 하나를 켜면 온 방이 밝아지는 것과 같고, 추운 겨울날 서리와 얼음 위에 태양이 떠오르면 서리와 얼음이 저절로 녹아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진성참회(眞性懺悔)라 합니다. 작상참회나 사참회(事懺悔)처럼 업의 표면적이고 현상적인 부분을 서서히 다스리는 것과는 달리, 진성참회는 선하지 못한 업의 뿌리 자체를 단번에 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우리가 쌓인 악업을 안다면, 참회의 마음을 품고 곧바로 불호를 드리는 수행을 힘써야 합니다. 오직 이 길만이 과거의 악업을 소멸시키고 앞으로 새로운 악업이 지어지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다음 진리를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근원적인 마음의 본성은 부처님의 그것과 동일하여 둘로 나뉘지 않으며, 본래부터 구족하고 스스로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본성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가 밖에서 누군가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직접적인 각성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하는 까닭입니다.
분별사상과 집착이라는 장애를 걷어내는 즉시, 우리 안에 본래부터 갖추어진 불성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이는 마치 오래된 청동 거울과 같습니다. 그 거울은 천지를 두루 비출 수 있는 본래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나, 두꺼운 때와 먼지가 쌓여 있어 하나의 형상도 비추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 낡은 거울이 귀중한 보배임을 알지 못해, 헌 물건처럼 내던져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이 거울이 보배임을 알아차려, 집어 들어 씻고 닦아 오랫동안 쌓인 때와 먼지를 한 겹씩 없애 갑니다. 마침내 거울이 다시 빛을 내어 천지의 모든 형상을 비추게 됩니다. 거울의 비추는 능력은 그 자체의 본성 안에 갖추어진 것으로, 밖에서 어디서 구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때와 먼지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니, 이 비추는 능력은 거울 고유의 것입니다.
불성의 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직 미혹하여 괴로움에 빠진 그저 평범한 범부라 하더라도, 불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불성을 온전히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불성은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다"는 이 진리를 지혜로 깊이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핵심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이루셨을 때, 그 첫 말씀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중생은 여래의 지혜와 덕을 갖추고 있으나, 미혹한 생각과 집착에 가려져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불성은 항상 온전히 그대로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자라는 것은 오직 실천뿐입니다. 먼저 우리는 스스로 본래부터 불성을 갖추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범부는 보통 스스로 이 진리를 깨닫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한결같은 인내와 정진으로 우리를 가르치시는 까닭입니다. 부처님의 지혜의 눈을 뜨게 해주시며, 우리가 본래 불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 불성을 온전히 드러내려면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 이끌어 주십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먼저 자신 안에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불성을 이해하고 자각한 뒤에야 비로소 실천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수행과 증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정성스러운 수행과 자각을 통해 우리는 원래부터 우리 본성에 갖추어진 것을 회복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