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새, 잃어버린 둥지
한 재가신자가 불광(佛光)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한 재가신자가 불광(佛光)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경전에서는 수십만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보다 차라리 무심(無心)의 수행자 한 분께 공양하는 것이 더 큰 공덕이라 하였습니다. 그럼 수십만의 부처님께는 무슨 허물이 있으며, 무심의 수행자에게는 어떤 공덕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까?
선사는 시로써 답하였습니다. 한 줄기 흰 구름이 계곡 어귀를 가로지르니, 수없이 돌아가는 새들 제 둥지 잃었네.
선사의 풀이는 이러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새들이 길을 잃고 둥지를 찾지 못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한 줄기 흰 구름 때문입니다. 부처님께 공양할 때에는 자기 바깥의 것에 집착하게 되어 참된 자성을 보지 못합니다. 그 반면 무심의 수행자에게 공양하는 것은 무차별의 지혜를 행하여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수십만의 부처님께는 허물이 없으나, 무심의 수행자만이 스스로의 본성을 진실로 알아볼 수 있는 분입니다.
재가신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절은 이미 청정하거늘, 어찌하여 굳이 목어(木魚)를 치고 법고(法鼓)를 울립니까?"
선사는 다시 시로써 답하였습니다. 소리를 푸른 하늘 끝까지 높이 날려 보내면, 용문(龍門)에서 고개 숙이던 이 다시 만날 일 없으리.
선사의 해명은 이러했습니다. 청정한 도량에서 목어를 치고 법고를 울리는 것에도 그윽한 뜻이 있습니다. 목어는 물속에서도 물고기가 눈을 감지 않는다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쉬지 않고 정진할 것을 일깨우는 상징입니다. 법고는 업장(業障)을 소멸시키고 공덕과 복을 더하기 위해 치는 것입니다. 목어와 법고의 소리가 구름 너머로 높이 퍼져 나가는데, 어찌 다시 윤회의 괴로움에 빠져들겠습니까?
재가신자가 또다시 물었습니다.
"집에서도 이미 불도를 수행할 수 있는데, 굳이 출가하여 계를 받고 승복(僧服)을 입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사는 또다시 시로써 답하였습니다. 공작의 화려한 깃이 몸을 꾸민다 한들, 야생 거위 높이만큼은 못 날아오르느니라.
선사의 설명은 이러했습니다. 집에서의 수행도 물론 좋으나, 한 가지에 마음을 모아 전념하는 출가의 수행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공작이 아무리 화려할지라도, 거위처럼 높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침내 재가신자 마음의 의문은 불광 선사의 손길에 말끔히 풀려나갔습니다.
풀리지 못한 질문은 마음을 수없이 옭아매는 매듭과 같습니다. 그러나 한 번 설명을 듣게 되면, 그것은 마치 구름을 헤치고 맑은 하늘을 마주하는 듯합니다. 선(禪)은 어떤 때는 설명을 주지 않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설명을 주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그 말들은 종종 질문과 동떨어진 듯이 보입니다. 글줄 사이의 뜻을 읽어낼 수 있다면, 선사들의 한마디 한마디, 한 동작 한 동작, 한 움직임 한 움직임, 한 침묵 한 침묵이 모두 선(禪) 그 자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