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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의 법문

원주 스님

원주 스님

관세음 법문은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설하신 「근성원통(耳根圓通)」이다. 이는 25종의 원통 가운데 하나로, 독보적이면서도 지극히 높은 수행·증득의 법문이다. 문수사리보살이 어느 원통 법문을 선택하여 설하셔야 할지 논하셨을 때, 『수능엄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일체의 부처님들이 나아가는 열반의 관문이며, 미세한 티끌에 이르기까지 또한 그러합니다. 과거의 모든 여래들은 이미 이 문으로 성취하셨고, 현재의 모든 보살들은 지금 이 원만하신 광명을 들어가고 있으며, 미래의 수행자들도 마땅히 바로 이 법에 의지해야 합니다. 저 또한 이로써 깨달았으니, 아발로키테ś바라 보살 혼자만의 일은 아닙니다.」 이 법문이 얼마나 지극히 높은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토록 지상하다 보니 보통 초심자나 선근(善根)이 얕은 분들이 쉽게 수행하고 증득할 수 있는 법문은 아니다. 이러한 연유로 석가모니부처님은 중생의 다양한 소질에 맞추어 무수한 법문을 설하셨다. 어떤 것은 광대하고 어떤 것은 좁으며, 어떤 것은 현교(顯敎)요 어떤 것은 밀교(密敎)이며, 어떤 것은 점수(漸修)이고 어떤 것은 돈수(頓修)이며, 어떤 것은 방편(方便)이고 어떤 것은 종국(究竟)이다. 「법문은 무한하되 모두 중생을 위하여 세워진다」는 말이 있듯이, 그 무수한 법문들 가운데 근성원통이 가장 지극한 것이다. 이는 진실로 불도(佛道)로 들어가는 문이라 부를 만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법문은 아니다. 이문원통(耳門圓通)은 곧 관세음보살 자신이 수행하고 체득하여 자기 경험으로 설하신 법문이며, 고대의 여래 아발로키테ś바라께서 전하신 법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문원통을 관세음 법문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관세음 법문은 근래에 사견 망식이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관세음 법문」과는 같지 않다. 미혹한 사람들이 선전하는 그것은 사도(邪道)이다. 음성을 쫓아다니고, 따라 흘러가며, 밖으로 집착하고, 소란에 시달리며, 마귀에 흘러드는 것이다. 이에 비해 근성원통은 관세음보살의 법문이다. 관세음보살은 조건으로 생긴 모든 현상의 생멸(生滅)을 버리시고, 참되고 항상한 것에 의지하셨다. 청각의 방향을 역으로 그 근원으로 돌이켜 듣는 본성을 관조하시고, 소리의 성품을 완전히 녹여 없애셨다. 소리가 멸한 자리에서 듣는 바의 원만한 진리를 깨달으신 것이다. 솔직히 불법을 모르시는 분들이 남에게 속아 어안을 진주로 넘겨받고, 잘못된 가르침에 흘러들어가실까 걱정된다. 그래서 오늘 특별히 이 주제를 들어 바른길을 밝히고, 참과 거짓을 가려내며, 정과 사(邪)를 분석하고자 한다. 다만 내용은 제법 깊어 쉽게 파악하기 어려우니, 이야기를 듣거나 농담을 듣는 것처럼 가볍고 재미있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분 모두 열심히 들으시길 바란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시면 질문을 받들 때 말씀해 주시면 함께 토론할 수 있다. 이문원통은 관세음보살 자신이 직접 수행하고 증득하신 법문이며, 보살 자신이 직접 펼치신 법문이므로, 그 법문을 알기에 앞서 먼저 관세음보살의 출신과 성별, 그리고 성명의 연유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곳에 오신 모든 분들이 알고 싶어 하시는 것이라 믿는다.

I. 관음보살의 기원

관음보살은 사바세계의 중생과 유독 깊은 인연을 맺고 계신 분이다. 특히 중국 절강(浙江) 지역에서는 관음보살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다. "가옥마다 아미타불, 집집마다 관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미국에서도 "해피 부다(Happy Buddha)"를 아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관음(GWANYIN)"을 아는 사람은 그보다 더 많다. 그런데 사실 관음보살은 불과 한 생을 남겨두고 불이 되실 자리에 계신 보살로, 수십억 겹의 불토 너머 서방 극락정토에 머물러 계신다. 지금도 아미타불을 보좌하여 중생을 가르치고 감화하시는 일을 하고 계신다. 무량겁이 흘러 아미타불이 한밤중 전반에 입멸하시면, 그 후반에 관음보살이 불의 경지를 이루어 "덕왕광명산불(德王光明山佛)"이라는 불호를 받으신다. 사실 관음보살은 이미 오래전에 부처가 되신 분이다. 그때의 호는 여래정법명(如來正法明)여래다. 그런데 미혹의 길에 오래도록 헤매는 중생을 가엾게 여기신 대자대비의 마음이 움직이셨기에, 이미 부처의 과실을 거두시고도 여전히 그 인(因)을 실천하셨다. 보살의 모습을 빌려 여러 부처님을 보좌하시며 법륜을 돌리셨으니, 아미타불을 도우신 것은 물론이고 십방 모든 부처님을 도우신 것이다. 석가모니불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시자, 관음보살은 사바세계의 인도 남쪽 보탈라카산(普陀洛迦山)에 도량을 여시어 부처님의 법륜을 돌리시며 중생을 구제하셨다(《화엄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불법이 동방으로 전해지자, 다시 중국 절강 남해안의 보타산(普陀山)에 실천과 도량의 장소를 세우셨다. 전해지기로는 남북조 시대 양(梁)나라 명진(明眞) 연간에 혜업(慧鍱)이라는 일본 승려가 불법을 구하기 위해 중국에 왔다. 그는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참배하다가 관음보살의 성상(聖像)을 보게 되었는데, 그 모습이 순수하고 장엄하며 고요하기 그지없어 무한한 그리움이 일었다. 일본으로 모셔 가 공양하고 싶었으나 주지 스님의 허락을 받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미리 말없이 성상을 모시고 곧바로 배를 타고 동쪽으로 출항, 귀국 길을 재촉했다. 배가 절강 주산(舟山) 군도의 신라초(新羅礁) 근처 해역에 이르렀을 때, 바다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쇠로 된 연꽃들이 갑자기 솟아올라 배를 가로막고 더는 나아갈 수 없게 했다. 사흘 낮 사흘 밤을 그렇게 머물러 있었다. 승려는 보살께 기도를 올렸다. "일본 중생이 모실 인연이 없다면, 배가 흘러가는 곳 어디든 가서 그곳에 전각을 짓고 성상을 모시겠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배는 다시 흘러가 조음동(潮音洞) 곁에 닿았다. 혜업은 배에서 내려 산으로 올라가던 중 한 어부를 만나 이 사연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어부는 크게 감동하여 자기 집을 내어 관음보살의 성상을 모시게 하고, "가실 줄 모르는 관음의 뜰(不肯去觀音院)"이라 이름 지었다. 혜업은 이로써 보타산의 개산조(開山祖)가 되었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관음보살의 기원은 실로 위대하다. 그는 다만 한 생을 남겨두고 불이 되실 보살이 아니라, 이미 불의 자리에서 세상으로 돌아오신 보살이시다. 어찌 고향이나 출생지를 가리켜 말할 수 있겠는가?

II. 관음보살의 성별

관세음보살은 부도(佛道)에서 오신 보살이시며, 일찍이 불과(佛果)를 깨우친 분이십니다. 위로는 십방일체제불(十方一切諸佛)의 본래 묘각(妙覺)하신 마음과 하나가 되어 그들과 동일한 자비의 힘을 나누시며, 아래로는 육도(六道)의 일체 중생과 하나가 되어 그들과 같은 자비의 그리움을 나누십니다. 삼십이응신(三十二應身)으로 미혹한 중생을 이끄시는 데 그치지 않고, 중생들에게 십사무이(十四無畏)의 덕과 사불사의(四不思議)의 힘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십니다. 따라서 그분의 성별이 남성이라 하든, 여성이라 하든, 범부라 하든, 성인이라 하든, 사람이라 하든, 사람이 아니라 하든 어느 말이든 틀리지 않습니다. 예컨대 유가연구(瑜伽焰口) 의식의 염면대성(焰面大聖)은 곧 관세음보살이 화현하신 귀왕신(鬼王身)이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찌 범부의 미혹한 생각으로 보살의 성별을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

범부는 아직 윤회(輪廻)를 벗어나지 못해 시공(時空)에 구속되고 일체 만법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온갖 분별—남녀, 인축(人畜), 성범(聖凡), 심지어 선악(善惡), 미추(美醜)에까지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시공을 초월하여 윤회를 벗어나 본래의 불성(佛性)으로 돌아가 깨닫는다면—불성은 평등하여 일체 대멸(對滅)을 떠나, 정오(正誤)를 떠나, 언어(言語)를 떠나, 마음과 생각이 미치는 바를 초월하니—어찌 중생과 부처, 범부와 성인의 분별이 있겠습니까? 성속(聖俗)이 녹아 사라지고 중생과 부처가 하나가 되는 자리에서, 성별을 논할 여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른바 성별이란 범부의 집착하는 미혹한 마음이 지어낸 허망한 이름과 형상(假相)에 불과합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도리어 상(相)을 본성으로 돌리고, 미혹을 물리쳐 진리를 드러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성별에 집착하고 거칠게 높고 낮음을 논하며, 남자를 여자보다 우대한다는 것은 참으로 옳지 않습니다.

『유마힐경(維摩詰經)』에 천녀(天女)가 꽃을 뿌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꽃이 보살들에게 떨어지면 모두 땅에 떨어졌으나, 대성문(大聲聞) 제자들의 몸에 떨어진 꽃은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의 대제자들이 온몸에 꽃이 덕지덕지 붙어 있으니, 참으로 위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자들은 모두 신통력(神通力)을 발휘하여 꽃을 떼어내려 하였으나, 아무리 해도 꽃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천녀가 사리불(舍利弗)에게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꽃을 떼려 하십니까?" 사리불이 대답했습니다. "이 꽃들은 법(法)에 합치하지 않기에 떼어내려 합니다." 천녀가 말했습니다. "이 꽃이 법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하지 마소서. 왜냐하면 꽃 자체에는 차별이 없는데, 바로 당신이 차별적 사고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佛)법(法)에서 출가(出家)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차별적 사고가 있다면 법에 합치하는 것이 아니고, 차별이 없다면 바로 법에 합치하는 것입니다. 꽃이 보살들에게 붙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일체 차별적 사고를 끊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람이 두려움 가운데 살면 비인간(非人)이 그 틈을 타는 것과 같이, 제자가 생사의 윤회를 두려워하면 육진(六塵)—형(色)·성(聲)·향(香)·미(味)·촉(觸)이 그 틈을 타는 것입니다. 이미 두려움을 떠난 사람은 오욕(五欲) 중 어느 것에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습기(習氣)가 아직 다하지 않은 사람은 몸에 꽃이 붙어 있고, 번뇌가 다한 사람에게는 꽃이 붙지 않습니다."

그러자 생기 있는 변론이 펼쳐졌습니다. 사리불은 혼자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놀랍도다. 여인이 어찌 이 같은 변설(辯說)과 통찰을 가지고 있을까? 이 같은 변설과 통찰이 있으니, 어찌 여인의 형상에 머물러야 하겠는가?" 그래서 사리불이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그대의 여성 몸을 변화시키지 않습니까?" 천녀가 대답했습니다. "

십이 해 동안 저는 여인의 자취를 찾았으나 끝내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겠습니까? 가령 마술사가 환술로 허상의 여인을 만들어 내는데, 누군가가 '왜 여인의 몸을 변화시키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것이 마땅한 질문이겠습니까?" 사리불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환상에는 고정된 형상이 없으니 변화시킬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천녀가 말했습니다. "모든 법 또한 이와 같아 고정된 형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여인의 몸을 변화시키지 않느냐고 묻습니까?" 그때 천녀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사리불을 변화시켜 천녀의 모습이 되게 하고, 자신은 사리불의 모습으로 변화했습니다. 그녀가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여인의 몸을 변화시키지 않습니까?" 천녀의 모습이 된 사리불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여인의 몸으로 변화하려면 무엇을 변화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천녀가 말했습니다. "사리불이여! 만일 그대가 이 여인의 몸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모든 여자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그대는 여자가 아니면서 여인의 몸으로 나타난 것과 같이, 모든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여인의 몸으로 나타날지라도 그들은 본래 여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모든 법이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고 설하신 까닭입니다." 그때 천녀가 신통력을 거두매 사리불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천녀가 사리불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여인의 몸 형상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리불이 대답했습니다. "여인의 몸 형상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천녀가 말했습니다. "모든 법도 마찬가지로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습니다.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아닌 바로 그것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입니다." 마침내 비마라거사가 사리불에게 이르되, 이 천녀는 이미 구십이억(九十二億)의 부처님께 공양했고, 보살의 방편선교(方便善巧) 신통력을 구족하며, 모든 원(願)을 이루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여 불퇴전(不退轉)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습니다. 원래의 원력으로 중생을 교화하고자, 원하는 어느 몸이든 자재롭게 나타납니다. 이처럼 구십이억의 부처님께 공양하고, 보살의 방편선교 신통력을 구족하며,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불퇴전에 머무른 천녀조차도 자유자재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보면, 일찍이 부도(佛道)를 이룬 관음보살은 하물며 어떠하겠습니까? 물론 관음보살은 남자의 모습으로도, 여자의 모습으로도, 심지어 십이류생(十二類生)의 모습으로도 자유자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법화경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데 어떤 몸이 필요하면, 관음보살은 바로 그 몸으로 변현하여 그들을 위해 법을 설한다"고 설하신 까닭입니다. 여러분도 이제 관음보살의 성별에 대해 다소 이해하셨겠지요?

III. 관음보살 성호(聖號)의 의미

이 보살이 어찌하여 관음(觀音, 곧 세상의 소리를 관(觀)하는 분)이라 불리는가 하면, 인(因)의 단계에서의 수행과 증(證), 그리고 과(果)의 단계에서의 중생 교화라는 두 방면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인(因)의 단계에서 수행과 증(證)을 살펴보면, '관(觀)'은 보살의 관(觀)하는 지혜를 가리키고, '음(音)'은 그 관(觀)의 대상인 세상의 소리를 가리킵니다. 《수능엄경》에서 관음보살은 스스로 과거 무량겁 전의 수행에서 여래 관세음을 만났고, 그분에게서 들리는 바를 통해 듣는 수행의 금강삼매(金剛三昧)를 허망(虛妄)한 것과 같이 가르침받았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 방법에 따라 귀(耳) 기관의 본래 밝은 성품을 근본으로 삼아 수행하여, 초발심(初發心)의 묘한 지혜를 발동시켰습니다. 삼계(三界)의 모든 소리가 다 단지 마음의 드러난 현상일 뿐임을 관(觀)하였기에, 소리를 따라잡지 않고 안으로 돌아가 청(聽)의 본성을 관(觀)하였습니다. 입류(入流) 망소(亡所)하여, 육결(六結)을 풀고 삼공(三空)을 초월하여 마침내 원통(圓通)을 성취하였습니다. 이에 과거의 여래 관세음께서 그에게 관음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셨습니다.

과(果)의 단계에서의 중생 교화 방면에서 보면, '관(觀)'은 보살의 조건 없는 대자비(大慈悲)와 동체(同體) 대자비를 가리키고, '음(音)'은 세상 중생들이 보살의 성호를 외우거나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를 가리킵니다. 《법화경》에서 이르기를, "만약 무량백천만억의 중생들이 갖가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그들이 관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한 마음으로 부르면, 관음보살께서 즉시 그들의 음성(音聲)을 관(觀)하시어 모두가 구제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관(觀)'은 구원하고 제도하는 분을 가리키고, '음(音)'은 제도받을 중생을 가리킵니다. 제도하는 이와 제도받는 이가 둘이 아니며, 중생의 소질과 가르침이 서로 부합할 때, 이것이 바로 관음이라 함의 뜻입니다.

'보살(菩薩)'의 뜻에 대해서는, 그 번역된 이름이 '각성한 존재(覺有情)'입니다. 자(自)利의 방면에서 해석하자면, '각(覺)'은 보살 자신의 각(覺) 마음을 가리키고, '유정(有情)'은 보살 자신을 가리킵니다. 보살은 진흙이나 나무로 빚어 만든 우상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과 같이 인식·감정·의지를 갖춘 고등한 생명이 됩니다. 다른 점은, 보통 사람들은 미혹에 빠져 있고 보살은 깨어 있으며, 보통 사람들은 미혹에 빠진 중생이지만 보살은 깨어난 중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중생의 무리 가운데 우뚝 서는 성인(聖人)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타(他)利의 방면에서 보면, '각(覺)'은 보살이 체득한 깨달음의 도(道)를 가리키고, '유정(有情)'은 그에 의해 교화되는 중생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보살이라 일컬음을 받는 까닭은, 진리를 깨우친 뒤 연민(憐憫)과 정의감에 이끌려 자비를 일으켜 지혜를 점화하고, 사회에 몸을 던져 그 도(道)로써 중생을 깨우쳐, 인간 삶의 미혹을 해소하고 본래의 각성을 발현시키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自)利와 타(他)利를 합하여 살펴보면, '각(覺)'은 위에서 부처의 도(道)를 구하는 자(自)利의 행덕을 가리키고, '유정(有情)'은 아래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타(他)利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자(自)利를 위해 부처의 도(道)의 각성을 구하고, 타(他)利를 위해 중생을 교화하는 사람—자(自)利는 지혜요, 타(他)利는 자비이니, 자비와 지혜가 합하여 자아와 타인 모두 이익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각성한 존재(覺有情)'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菩薩)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살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곧 범(凡)보살, 성(聖)보살, 그리고 불보살(佛菩薩)입니다. 아직 범(凡)의 지위에 머물러 있는 이들은 대승(大乘)의 법을 듣고서야 비로소 보살의 마음을 일으켜 보살도를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보살의 마음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는 이들의 공덕(功德)이 아직 얕고 번뇌(煩惱)는 아직 끊어지지 않습니다. 비록 마음에 열정이 가득 차 있어도, 인연(因緣)에 이끌려 다니다 보니 자신의 위대한 서원과는 아직 맞지 못합니다—이들을 일러 범보살이라 합니다. 오래전에 이미 보살의 마음을 일으켜 보살도를 꾸준히 행하여 번뇌를 끊고 생사(生死)를 마쳤으며, 불도의 공덕을 부분적으로 증득하여, 일체 부처님 앞에서 수없는 신(身)을 나타내어 부처님을 도와 일체 중생(衆生)을 교화하며 불종(佛種)을 이어가는 이들을 일러 진(眞)부처의 아들이라 하며, 모든 부처님이 항상 칭찬하시는데, 이를 성보살이라 합니다. 이들은 참으로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의 이름에 걸맞습니다. 그리고 삼각(三覺)을 모두 갖추어 모든 덕(德)을 완성하고, 이미 오래전에 부처의 경지에 도달했으면서도, 깊은 서원과 대자대비(大慈大悲)로 미혹(迷惑) 속에 오래도록 방황하는 중생을 불쌍히 여겨, 대법선(大法船)을 돌이켜 구법계(九法界)의 흐름을 따라가며, 갖가지 몸으로 나타내고, 갖가지 법을 설하며, 갖가지 중생을 제도하는 이들이 있으니, 마치 과거에 부처가 되어 ‘정법명여래(正法明如來)’라 칭해진 관세음보살, 과거에 부처가 되어 ‘용종순정왕불(龍種純淨王佛)’이라 칭해진 문수보살, 그리고 과거에 부처가 되어 ‘금미여래(金粟如來)’라 칭해진 비구(居士) 비마라미(維摩詰) 같은 이들이 그러합니다. 부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수보리(須菩提)는 과거에 부처가 되어 ‘용왕여래(龍王如來)’라 칭해졌고, 안굴말라(鴦掘魔羅)는 과거에 부처가 되어 ‘제중생희여래(諸衆生喜如來)’라 칭해졌으며, 사리불(舍利弗)은 과거에 ‘금용왕여래(金龍王如來)’였습니다—이 모든 이들은 불국(佛國) 안에 나타난 보살들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이미 오래전에 불도를 깨달았으므로, 물론 그 또한 불국(佛國) 안에 나타난 보살입니다.

IV. 관세음보살이 수행(修行)하고 증득(證得)한 법문(法門)

IV. 관세음보살(아바록테쉬바라)이 수행하고 증득한 법문(法門)

관세음보살이 수행하고 증득한 법문은 이근(耳根)의 청성(聞性)에서 출발하여, 끝내 미혹에서 벗어나 본성으로 돌아와 부처의 깨달음을 이룹니다. 이것을 이문원만관통(耳門圓滿貫通)이라 합니다. 관세음보살이 이문원만관통을 어떻게 수행하여 미혹에서 진실로 돌아갔는지 살펴보기 전에, 먼저 중생이 어떻게 본성을 잃고 허망한 분별상을 일으키게 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는 진(眞)을 잃고 허(假)를 일으키는 과정, 그리고 다시 허(假)에서 진(眞)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매우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는 관계로, 여기서는 간략하게만 소개하겠습니다.

중생은 본래부터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 온전하고 광명한 불성은 만유(萬有)에 두루 퍼져 있고, 능(能)과 소(所)의 분별이 없으며, 일체의 상대적 척도를 초월하며, 시간과 공간을 떠나 생사에 걸림이 없으며, 완전히 청정하고 자재(自在)합니다. 그런데 무량겁(無量劫) 이래 어느 한순간의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중생들이 미혹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무명에 가리어 자신과 타인의 분별을 잘못 일으킨 것입니다. 이른바 "일념(一念)의 무명으로 삼세현미(三細現前)"이라 하듯, 무명이 진여(眞如)를 더럽혀 청정한 무집(無染)한 심식이 제8아뢰야식(阿頼耶識, 아라야식)이 되니, 이는 생(生)과 무생(無生)이 섞인 것입니다. 이것이 제1차살결(奢摩他結, 체살결)입니다. 삼세현미(三細)에서 육거(六麁)가 자라납니다. 무명이 진정한 지혜를 가리니, 그 삼세현미 안에서 "능견(能見)의 상(相)"과 "소견(所見)의 상(相)"이 다름 아닌 마음에서 나온 허망한 형상임을 알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거짓 앎과 봄이 일어나, 제7마나식(末那識, 곧 집행심)에 분별하는 "지혜의 상(相)"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본래부터 자기와 법(法)에 집착하는 데 해당하며, 제2수태(脩䢋, 즉 수태화결)입니다. 능(能)과 소(所)가 서로 대립하게 되면, 거짓 사량이 쉬지 않고 일어나 분별이 그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육거(六麁) 가운데 "상속(相續)의 상(相)"으로, 법(法)에 대한 분별집착에 해당하며 제3지각결(知覺結)을 이룹니다. 앎과 봄이 점점 더 뿌리내리면 대상에 집착하여 집(執)과 거(拒)를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대상이 마음을 끌어당기고, 명암(明暗)·개폐(開閉) 등 12종(種)의 허망한 감각 자료가 마음의 청정한 광명에 부착되어,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느끼고 아는 작용과 그에 따르는 모든 마음의 반응을 일으킵니다. 마음은 다시 대상에 집착합니다. 봄의 본질이 형(形, 색)을 반영하여 눈의 근(根, 인(根))으로 엉기고, 듣는 본질이 소리를 반영하여 귀의 근(耳根)으로 엉기며, 이와 같이 아는 본질이 법(法)을 반영하여 의(意)근(根)을 형성합니다. 이로써 육근(六根)이 형성됩니다. 이것은 본래부터 자기 집착에 해당하며, 육거(六麁) 가운데 "집(執)하는 상(相)"으로 제4근본결(根本結)을 형성합니다.

육근(六根)이 일단 형성되면, 그것은 쉬지 않고 밖으로 대상을 향해 뻗어 육식(六識)의 분별 작용을 일으킨다. 안으로는 자아를 인식하고, 밖으로는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삼는다. 이것이 육조(六麤) 가운데 '명상(名想)'의 면으로서 분별적 아집(我執)에 속하며, 다섯 번째 *정결(靜結)*을 이룬다. 중생은 아(我)와 법(法)이 모두 공(空)임을 깨닫지 못한다. 안으로는 실재하는 자아에 집착하고, 밖으로는 실재하는 법에 집착하여, 하루 종일 육근이 육경(六境)을 따르니—탐진치(貪瞋癡)를 일으키고 살생(殺生)·도(盜)·사음(邪淫)을 행하게 된다. 이것이 육조 가운데 '업(業)을 짓는 면'이다. 업이 성숙하여 결과를 맺어 세 가지 연속성이 일어나니, 곧 중생의 연속성, 세계의 연속성, 그리고 업과 그 과(果)의 연속성이 그것이다. 이로부터 이 몸은 업에 결박되어 괴로움이 참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육조 가운데 '업에 묶여 괴로워하는 면'으로서 여섯 번째 *동결(動結)*을 이룬다.

미혹에서 진리로 돌아가—오온(五蘊)을 깨뜨리고, 육결(六結)을 풀며, 무명(無明)을 소멸하여 법신(法身)을 체득하려면, 육관(六官)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그 한 문(門)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 말씀하시기를, "한 가지 관(官)으로 허망되지 않은 경지에 들어갈 수 있으면, 육근이 일시에 정(淨)하게 된다. 한 뿌리를 뽑아 집착에서 떨어져 안으로 돌아오면, 본래의 참(眞)에 안주하여 선천적으로 빛나는 광채가 드러나리라. 그 본성의 광채가 온전히 드러남에 이르면, 나머지 다섯 가지 집착도 뽑혀 다 놓이리라." (수능엄경 참조)

이것이 시방(十方)의 부처님들—티끌 같이 많으신—이 한 목소리로 아난(阿難)에게 말씀하신 까닭이다. "아난아, 잘 말하였도다. 너의 생사윤회(生死輪廻)를 일으키는 무시(無始)의 무명, 곧 생사결(生死結)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다름 아닌 너의 육근이요, 안락(安樂)과 해탈(解脫), 묘이상(妙異常)한 상주(常住)를 빠르고도 널리 체득하는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 또한 다름 아닌 너의 육근이다." 아난이 이해하지 못하여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찌 됨인지 생사의 윤회와 묘이상한 상주의 경지가 모두 이 같은 육근으로 말미암고, 그 밖에는 다른 것이 없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뿌리와 대상은 같은 근원에서 나왔으며, 결박과 해탈은 둘이 아니다." 또한 이르셨다. "지견(知見)을 세우는 것이 무명의 근본이요, 지(智)는 있으나 견(見)이 없는 것이 불멸하고 무루(無漏)하며 무염(無染)한 열반의 청정한 본성이다." 이르셨다. "매듭을 묶는 것과 푸는 것은 같은 인연에서 일어나니, 성인(聖人)과 범부(凡夫)가 함께 한 길을 걸는다." "미혹하고 어두운 것이 무명이요, 명(明)히 밝은 것이 해탈이다." "차례대로 매듭을 풀되, 육(六)이 다 풀리면 그 하나[근원적 바탕]도 또한 소멸된다. 한 뿌리를 택하여 원통(圓通)하게 관(貫)하고, 흐름 속으로 들어가 정각(正覺)을 성취하라."

아난(阿難)이 "우리 이 몸과 마음이 어떻게 매듭지어져 있는지, 그것을 푸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여전히 깨닫지 못했고, "여섯 가지가 풀리면 하나가 사라지며, 매어짐과 풀림에 일정한 순서가 있다"는 원리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부처님은 사자좌(獅子座) 위에 있던 하늘의 꽃 수건을 들어 대중 앞에서 차례로 여섯 개의 매듭을 지으셨다. 그 수건 자체는 본래 매듭이 없었으니, 이는 중생(衆生)의 참마음이 본래 걸림이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수건에 매듭을 짓는 것은 중생이 진실(眞實)을 잃고 허망(虛妄)을 일으키는 것을 상징한다. 무명(無明)과 무지(無知)에서부터 미세한 삼세(三細)가 일어나고, 연(緣)을 발판으로 삼아 거친 육거(六麤)가 자라난다. 이로써 오온(五蘊)과 여섯 매듭이 형성되고, 근본이 육경(六境)에 속박되어 생사(生死)의 윤회 속에서 자유를 얻지 못한다. 매듭에는 순서가 있다. 매어질 때는 하나에서 여섯으로, 풀릴 때는 여섯에서 하나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중생의 오온(五蘊) 번뇌가 미세한 데서 거친 데로 일어나고, 거친 데서 미세한 데로 소멸된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른바 "생(生)은 식(識)에서 일어나고, 멸(滅)은 색(色)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매듭을 풀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중심에서 풀어야 저절로 풀린다. 좌우로 잡아당겨서는 풀리지 않는다. 이는 중도(中道)와 승의(勝義)의 가르침을 따르면 자연히 미망(迷妄)에서 진리로 돌아올 수 있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만일 범부(凡夫)의 견해, 소승(小乘)의 견해, 혹은 외도(外道)와 마도(魔道)의 견해에 집착한다면, 매듭은 풀기 어려울 것이다.

비록 여섯 매듭은 동일한 근본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한꺼번에 형성된 것이 아니므로, 풀림 또한 반드시 순서를 따라야 한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 이르기를, "이 근본이 처음 풀릴 때, 먼저 무아(無我)를 증득한다. 공(空)의 성품이 완전히 명백해지면, 다시 법(法)에 해탈한다. 일단 법에 해탈하면, 공(空)과 불공(不空)의 이분(二分)이 더는 일어나지 않는다 — 이를 보살이 삼매(三昧)에서 무생(無生)의 인(忍)을 얻었다고 한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이문원통(耳門圓通)을 수행함도 마찬가지로, 매듭을 차례로 풀어 한 겹씩 더 깊이 들어가고, 마침내 보리(菩提)를 온전히 증득하는 것이다.

(I) 가르침에 따른 수행과 깨달음

수능엄경에서 관세음보살은 부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난날을 돌이켜 생각하옵니다—갠지스 강변의 모래처럼 셀 수 없이 많은 겁(劫) 전에, 세상에 관자재(觀自在)라 불리는 부처님께서 출현하셨습니다. 저는 그 부처님께 보리심을 발하였고, 그 부처님께서는 듣는 수행(聞)·관찰하는 수행(思)·실천하는 수행(修)으로 삼매에 들어가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듣는 지혜(聞慧)·관찰하는 지혜(思慧)·실천하는 지혜(修慧)의 세 가지 지혜는 삼학(三學)을 닦는 사다리이며, 범부(凡夫)를 성인(聖人)으로 변화시키는 근본입니다. 보통 수행에서 듣는 지혜는 이의(耳識)와 의식(意識)을 쓰고, 관찰과 실천은 오직 의식(意識)만을 씁니다. 그러나 과거 부처님 관자재께서 깨쳐 주신 듣는 지혜는 이근(耳根) 자체의 청성(聽性)을 활용합니다. 의식은 생사의 뿌리요, 청성은 부처가 되는 참된 인(因)입니다. 이제 가르침을 따라 관세음보살은 이를 실천에 옮기십니다. 이근의 청성을 그 자체로 되돌려, 안으로는 이의의 분별을 따르지 않고, 밖으로는 들리는 소리의 대상을 붙잡지 않으시니—그저 들을 수 있는 청성 자체를 들으십니다. 이것이 듣는 지혜입니다. 본성각(本性覺)의 원리에 기대어 시각(始覺)의 지혜를 일깨우되, 공(空)에도 유(有)에도 집착하지 않으시는 것이 관찰하는 지혜이며, 생각마다 허망(虛妄)한 데서 돌아서 집착을 떠나 안으로 근원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실천하는 지혜입니다.

이와 같이 듣고, 관찰하고, 실천해 나감에 따라 시간과 정진이 깊어지면, 본래 갖추어진 광명스러운 밝음이 저절로 빛을 발합니다. 여섯 고리가 풀리고, 다섯 온(五蘊)이 깨지며, 다섯 탁(五濁)을 초월하여 마침내 완전히 통달하여 삼매에 들게 됩니다. 시각(始覺)의 지혜가 본성각(本性覺)의 원리와 합쳐지는 것을 환(幻)한 음사(聞思)수(修)의 금강삼매(金剛三昧)라 합니다. 보통 중생은 이근이 소리 대상을 만나는 즉시 이의의 분별을 일으킵니다—대상이 있을 때에는 의식이 있고, 대상이 없을 때에는 의식이 없습니다. 그들은 소리에 이끌려 무상한 즐거움에 빠지고, 생사가 끊임없이 일어나므로 생사의 흐름에 빠지고 맙니다.

관세음보살이 금강삼매를 닦으실 때, 삼매의 경지 안에서 청성을 안으로 돌려 소리와 분리하셨습니다. 환(幻)한 시각(始覺)의 지혜를 관찰자로 삼고, 소리를 지각하는 청성을 관찰 대상으로 삼아, 안으로는 분별하는 미혹한 의식에 기대지 아니하시고, 밖으로는 소리 대상의 흐름을 따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르기를, "뒤집힌 청각의 작용을 돌이켜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본성을 들으라" 하였습니다. 이같이 하면 바깥의 들리는 소리를 놓아주고 성자의 열반(涅槃) 흐름에 들어서실 수 있습니다. 이로써 "듣는 속에서 먼저 흐름에 들어가 대상을 놓아준다"고 합니다.

귀근(耳根)이 만나는 음진(聲塵)에는 동(動)과 정(靜)이 있으니, 동은 소리가 있는 것이고, 정은 소리가 없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이 처음 들음 안에서 수행할 때—법류(法流)에 들어 진(塵)을 놓았을 때—그녀가 놓은 것은 소리의 동(動) 측면뿐이었고, 초과(初果)의 성인이 되는 흐름에 들어서게 되었다. *동의 결(動結)*은 풀렸으나, *정의 결(靜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계속 수행하면서, 그녀는 외부 소리의 동적 측면만 놓은 것이 아니라, 정적 측면 역시 붙잡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 이르기를, "들어가는 바가 이미 고요하니, 동(動)과 정(靜)의 두 측면이 분명히 일어나지 않는다." 동(動)은 스스로 움직이나 보살은 그것에 움직이지 않고, 정(靜)은 스스로 머무나 보살은 그것이 정(靜)됨을 알지 못한다. 그녀의 마음에는 동(動)과 정(靜)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녀는 여섯 감진(感塵)을 버리고, 여섯 의식(意識)을 끊으며, 분별적 자집착을 끊고, 업(業)을 만드는 면과 업(業)에 묶이는 괴로움의 면을 소멸하며, 색수(色蘊)를 돌파하고, 겁탁(劫濁)을 초월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점차 깊어지면서, 그녀의 지혜는 자랐다. 듣는 대상만이 다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듣는 귀근(耳根)조차도 다하였다. 『수능엄경』에 이르기를, "이와 같이 차례로 증진하면, 듣는 바와 그것을 듣는 것이 모두 다한다." 이 지점에서 하나의 근(根)이 근원(本源)으로 돌아가고, 여섯 근(根)이 해방되었다. 여섯 거친 상태 중 이름과 집착의 측면이 소멸되어, 그녀는 수용수(受蘊)를 돌파하고, 견탁(見濁)을 초월하며, 견(見)상의 망상과 사(思)상의 망상을 끊고, 참된 공(空)임을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히 *정의 결(靜結)*을 푼 것이 아니라, *근의 결(根結)*도 동시에 풀린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수능엄경』에서 "이 근(根)이 처음 풀릴 때, 먼저 인(人) 공(空)을 깨닫는다"고 이른 뜻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인(人) 공(空)을 깨닫는 것—선천적 자집착(俱生自執着)을 끊는 것—에 불과하다. 법(法)에 대한 집착은 여전히 남아 있어 더 깊은 수행이 필요하다. 만약 이 과(果)에 머물러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으로 나아감을 거부한다면, 결정된 성질의 성문(聲聞)이 된다. 관세음보살은 삼매(三昧) 안에서 듣는 것을 다하고 거기 머무르지 않고 곧장 나아갔다. 그녀의 관(觀)하는 힘은 강하였다. 그녀는 만법(萬法)이 오직 마음에서만 일어남을 온전히 깨달았으며, 공(空)과 유(有)의 양 극단 자체가 중도(中道)임을 알았다. 인지된 근(根)과 감진(感塵)이 공(空)한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아는 지혜조차도 공(空)하였다. 지(智)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녀는 법(法)에 대한 분별집착을 끊으며, *각의 결(覺結)*을 풀고, 상수(想蘊)를 돌파하며, 번뇌탁(煩惱濁)을 초월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듣는 바를 다하되 거기 머무르지 않는다; 아는 자와 그 아는 바가 모두 공(空)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공(空)의 성품이 완전히 밝혀져, 법(法)에서 벗어나 해방된다"와 같다.

여기에서 환묘금강정(幻妙金剛正智)의 힘을 입어 한층 더 정진했다. 능지(能知)와 소지(所知), 그리고 지혜의 경계가 모두 공(空)일 뿐만 아니라, 그 지혜 경계의 공까지도 비울 수 있었으니, 공이 지극히 원만하게 구족되었다. 공의 상(相)이 꺼지면, 그 상을 아는 마음까지 함께 사라졌다. 이때 생사(生死)가 철저히 끝났고, 무명(無明)에 따른 법집착(法執)을 부분적으로 끊으며, 공결(空結)을 풀고, 행음(行蘊)을 뚫으며, 중생의 탁(濁)을 초월했다. 행음이 다하니, 식음(識蘊)이 드러났다. 이에 "공과 지(智)가 원만히 구족하면, 공을 비우는 그것도 스스로 멸하고, 생사가 멸하면 청정한 열반(涅槃)이 나타난다"는 말이 성립한다. 이것이 곧 "법(法)에서 벗어나면 공과 불공(不空)의 두 가지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결은 풀렸으나, 멸결(滅結)은 여전히 남아 풀어야 했다. 그것이 남아 있는 한, 이(理)를 완전히 통달하는 데 장애가 된다. 생사가 멸하고 청정한 열반이 나타난 그 순간,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금강삼매(金剛三昧)의 힘으로 식음을 뚫고 멸결을 풀며,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마음을 여래장(如來藏)과 합쳤다. 여래장은 법계(法界)에 두루 깃든 묘묘하고 광명한 지혜이니, 하나의 참된 광명이다. 식음이 곧 불성(佛性)임을 깨닫고, 부처님의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얻었다. 그리하여 "갑자기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초월하여, 시방(十方)에 두루 원명(圓明)하며, 두 가지의 가장 뛰어난 덕을 얻는다"는 것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세간'이라 함은 앞서 설한 생사의 영역, 곧 움직임이 멸하고 고요함이 일어나며, 고요함이 멸하고 근(根)이 일어나고, 근이 멸하고 지(智)가 일어나며, 지가 멸하고 공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출세간'이라 함은 공이 멸하고 식(識)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승(二乘)은 이것을 집착하여 열반이라 여기지만, 보살은 그 안에 머물면서 두 가지 모두 공함에 머문다. 관세음보살은 만법(萬法)이 마음뿐임을 깨달아, 공에도 유(有)에도 집착하지 않았다. 생사도, 열반도 모두 멀리 놓아두었으니, 그것을 놓아두는 행위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공(自空)과 법공(法空)의 공조차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음이 머무는 곳이 전혀 없이 지극히 청정(淸淨)했다. 수행과 깨달음이 이 단계에 이르러, 육결(六結)이 모두 풀리고, 묘심(妙心)이 온전히 각성되었으며, 파(破)·초(超)·증(證)이 모두 구족되었다. 세간과 출세간 어느 것에도 걸림없이 두 가지를 모두 초월하여, 식성(識性)이 원명하게 드러나 온 법계에 두루 비추었다. 이처럼 "시방에 두루 원명한" 것은 그녀의 수행과 깨달음의 공덕을 나타내고, "두 가지 가장 뛰어난 덕을 얻음"은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한 공덕을 나타낸다.

(II) 깨달음의 실천

환관(幻觀)의 청정한 수행으로 생사가 멸하고 청정한 열반이 나타날 때까지 금강삼매를 수행한 후, 관세음보살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 걸음을 더 내딛었다. 오음(五蘊)을 뚫고, 오탁(五濁)을 초월하며, 육결을 풀고, 갑자기 세간과 출세간을 초월하여, 모든 부처님과 같은 경지를 증하고, 시방에 두루 원명하며, 두 가지 가장 뛰어난 덕을 얻었다. 첫째, 위로는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본래 묘각(妙覺)한 마음과 합하여, 모든 여래와 동일한 자비의 힘을 나누었다. 둘째, 아래로는 시방의 육도(六道) 중생과 합하여, 모든 중생과 같은 자비와 정진의 발심을 나누었다. 이러한 본질적 깨달음에서, 보살은 모든 이의 필요에 널리 응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삼십이응신(三十二應身), 십사무외(十四無畏), 사불사의(四不思議)를 나타내었다.

1. 삼십이 응신(應身)

삼십이 응신은 다음과 같다: 불(佛) 신, 독각(獨覺, pratyekabuddha) 신, 연각(緣覺, pratyekabuddha) 신, 성문(聲聞) 신, 대범왕(大梵王) 신, 제석(帝釋, Śakra/Indra) 신, 화자재천(化自在天, Paranirmitavaśavartin) 신, 마혜사라(摩醯首羅, Maheśvara) 신, 천장(天將) 신, 사천왕(四天王) 신, 사천왕태자(四天王太子) 신, 인왕(人王) 신, 장자(長者) 신, 거사(居士) 신, 재상(宰相) 신, 바라문(婆羅門) 신, 비구(比丘) 신, 비구니(比丘尼) 신, 우바새(優婆塞) 신, 우바이(優婆夷) 신, 여주(女主) 신, 동자(童子) 신, 동녀(童女) 신, 제천(諸天) 신, 용(龍) 신, 야차(夜叉) 신, 건달마(犍闥摩) 신, 아수라(阿修羅) 신, 긴나라(緊那羅) 신, 마후라(摩睺羅伽) 신, 인간(人間) 신, 비인간(非人間) 신.

*수랑아화경(首楞嚴經)*에 이른다: "이른바 삼십이 청정묘응(淸淨妙應)이니, 제불토(諸佛土)에 두루 들어간다. 모두 음성수행삼매(音聲修行三昧)의 묘력(妙力)으로 자재(自在)히 무공(無功)으로 성취한 것이다."

*법화경(法華經)*에도 이른다: "어떤 나라에 중생이 있어 불(佛) 신으로 구제받아야 할 것이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불 신으로 현현(顯現)하여 그들에게 법(法)을 설(說)하리라. 연각 신으로 구제받아야 할 것이면, 연각 신으로 현현하여 그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성문 신으로 구제받아야 할 것이면, 성문 신으로 현현하여 그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대범왕 신으로 구제받아야 할 것이면, 대범왕 신으로 현현하여 그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제석 신으로 구제받아야 할 것이면, 제석 신으로 현현하여 그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화자재천 신으로 구제받아야 할 것이면, 화자재천 신으로 현현하여 그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마혜사라 신으로 구제받아야 할 것이면, 마혜사라 신으로 현현하여 그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천장 신으로 구제받아야 할 것이면, 천장 신으로 현현하여 그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비사문(毘沙門, Vaiśravaṇa) 신으로 구제받아야 할 것이면, 비사문 신으로 현현하여 그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소군왕(小君王) 신으로 구제받아야 할 것이면, 소군왕 신으로 현현하여 그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장자 신으로 구제받아야 할 것이면, 장자 신으로 현현하여 그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거사 신으로 구제받아야 할 것이면, 거사 신으로 현현하여 그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재상 신으로 구제받아야 할 것이면, 재상 신으로 현현하여 그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바라문 신으로 구제받아야 할 것이면, 바라문 신으로 현현하여 그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신으로 구제받아야 할 것이면, 이러한 신으로 현현하여 그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여장자(女長者)·여거사(女居士)·여재상(女宰相)·여바라문(女婆羅門)의 몸으로 구제받아야 할 것이면, 여자의 몸으로 현현하여 그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동자, 동녀 신으로 구제받아야 할 것이면, 동자, 동녀 신으로 현현하여 그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범천(梵天), 용(龍), 야차, 건달마, 아수라, 가루다(迦樓羅, garuḍa), 긴나라, 마후라, 인(人), 비인(非人)의 신으로 구제받아야 할 것이면, 이러한 신으로 현현하여 그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금강신(金剛神, Vajra-holding Deity) 신으로 구제받아야 할 것이면, 금강신으로 현현하여 그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두 경전 모두에서 보살이 삼십이 응신(應身)을 통해 여러 세계에 나타난다고 말씀하시나, 『수능엄경(楞嚴經)』에는 천부(天部) 응신 가운데 사천왕태자(四天王太子)가, 인간 응신 가운데 여군주와 왕비가 함께 실려 있어 『법화경(法華經)』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들입니다. 반면 『법화경』에는 팔종(八種) 비인(非人) 속에 가루다가 들어 있고, 그 여덟 밖에도 금강신(金剛神)이 덧붙어 있는데, 이것 역시 『수능엄경』에는 보이지 않는 내용입니다. 이는 두 경전 사이의 모순이 아닙니다. 보살의 묘한 응신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신비로운 변화는 측량할 수 없이 넓으니, 어찌 삼십이 가지로만 한정될 수 있겠습니까? 두 경전은 무한한 응신 가운데서 대표적인 삼십이 가지를 가려 말씀하신 것에 불과합니다.

두 경전 모두 보살이 여러 세계에 들어가 두루 유람하시며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설하셨으니, 이는 사바세계(娑婆世界)에만 머무르지 않고 십방(十方)의 세계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삼십이 응신이 곧 가르침이요, 모든 세계의 중생이 그것을 받아들일 분들이옵니다. 받아들일 인연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보살이 응하시니, 부르는 소리가 닿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인지(因地)에서 청관행(聽觀行)의 금강삼매(金剛三昧)를 닦은 데서 나왔으며, 힘들이지 않고도 자재롭게 이 일을 이루어 내시는 묘한 신력(神力)에서 비롯됩니다.

2. 십사무공(十四無畏)

인지(因地)에서 허망(虛妄)한 청관행(聽觀行)의 금강삼매를 닦아 망상을 끊고 진리를 깨우쳐, 세속(世俗)과 출세간(出世間)을 홀연히 초월한 관세음보살은, 위로는 십방의 모든 부처님 본래 묘각(妙覺)의 마음과 합일하사 여래와 같은 자비력을 나누어 가지시어 삼십이 응신으로 제 세계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실 뿐만 아니라, 아래로는 십방의 육도(六道)에 있는 모든 중생과 합일하사 그들과 같은 자비(慈悲)와 정진(精進)의 의지를 나누어 가집니다. 같은 자비를 나눔으로써 그들의 슬픔에 응하여 고통에서 건져 올리시고, 같은 뜻을 나눔으로써 그들이 구하는 바에 응하여 즐거움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성인과 범부가 본래 본질(本性)을 같이하니, 부름과 응답이 막힘 없이 서로 통합니다.

관세음보살의 법문

모든 중생은 보살의 마음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고통과 위기에 빠진 중생들이 한 마음으로 보살의 이름을 참송하면, 보살의 청정한 묘상(妙相)과 대자비의 마음으로부터 가피(加持)를 받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를 무위(無畏)의 공덕이라 합니다. 법화경(法華經)에는 이르기를, "이 관세음보살마하살은 공포와 위급한 위험의 때에 중생들에게 무위를 베풀어 주시나이다. 이 까닭에 이 사바세계의 모든 중생들이 그를 무위를 주는 자라 부르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중생들은 고통에 빠지고 헤아릴 수 없는 슬픔에 짓눌려 있으나, 관세음의 묘한 지혜와 힘은 괴로움의 세계를 구원할 수 있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은 무량의(無盡意) 보살에게 관세음이 중생을 삼재(三災)에서 구하고, 삼독(三毒)을 없애며, 팔난(八難)에서 해탈시켜 주신다고 말씀하셨으며, 나아가 모든 중생이 한 마음으로 관세음의 이름을 외우도록 권면하셨습니다.

수구라마경(楞嚴經)에서 관세음보살이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듣고 수행하여 닦은 문성삼매(聞性三昧)와, 무조건(無條件)의 묘력이 있는 금강삼매(金剛三昧)를 통해, 시방 삼시(三時)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과 같은 자비와 연민을 나누고 있기에, 저는 모든 중생이 제 몸과 마음으로부터 십사종(十四種)의 무위공덕(無畏功德)을 얻게 하나이다."

십사종(十四種)의 무위공덕(無畏功德)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시방의 중생들이 고통에 처했을 때, 보살의 음성을 듣는 즉시 해탈하나이다. 이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무위입니다.
  2. 큰 불에 들어간 중생은 불꽃에 타지 아니하나이다.
  3. 큰 물결에 휩쓸린 중생은 물에 빠져 죽지 아니하나이다.
  4. 귀신의 세계에 들어간 중생은 그들로 인해 해를 입지 아니하나이다.
  5. 형벌을 받게 된 중생은 무기가 산산이 부서지나이다.
  6. 야차(夜叉) 등 다른 귀신들 곁에 서 있는 중생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나이다.
  7. 차고(梏)와 쇠사슬에 갇힌 중생은 그것들에 묶이지 아니하나이다.
  8. 위험한 길을 여행하는 중생은 도적에게 약탈당하지 아니하나이다.

이상의 일곱 가지는 중생을 팔난(八難)에서 벗어나게 하는 무위입니다.

  1. 탐착하는 모든 중생은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나나이다.
  2. 분노와 원한이 가득한 모든 중생은 미움과 증오에서 벗어나나이다.
  3. 어리석고 우매한 모든 중생, 곧 무선심자(無善心者)──선한 마음이 없는 자들──는 영원히 망상의 어둠에서 벗어나나이다.

이상의 세 가지는 중생을 삼독(三毒)에서 벗어나게 하는 무위입니다.

  1. 법계에서 아들이 없는 중생이 아들을 소원하면, 지혜롭고 공덕 있는 아들을 받나이다.
  2. 법계에서 딸이 없는 중생이 딸을 소원하면, 아름답고 부드러우며 공덕 있는 딸을 받나이다. 이 딸은 모든 이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상서로운 상(相)을 갖추나이다.

이상의 두 가지는 두 가지 소원을 이루어 주는 무위입니다.

  1. 저의 이름을 지니는 중생은 육십이억항하사(恒河沙) 법왕자(法王子)들의 이름을 함께 지니는 중생과 동등한 공덕을 갖나이다.

이는 이름을 지님에서 오는 무위입니다.

보살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저의 한 이름이 많은 이름과 다름이 없나이다. 이는 제가 진원통(眞圓通)을 닦아 증득하였기 때문입니다."

관세음보살이 이근(耳根)의 원통(圓通)을 수행하시고 원(圓)·통(通)·상(常) 삼성(三性)을 체득하셨습니다. 그의 몸과 마음은 미묘하고 만유(萬有)를 포용하며, 온 법계에 두루 미치옵니다. 시방의 모든 중생은 그의 몸과 마음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까닭에 그의 성호(聖號)를 지니는 중생들은 육십이억항하사 법왕자들의 이름을 함께 지니는 중생과 동등한 공덕을 갖게 됩니다.

(3) 사불사의(四不思議)

능엄경에서 관음보살이 부처님께 말씀하시기를, "세존이시여, 저는 다시 이 원만한 통달을 얻게 되었습니다. 비할 데 없는 도를 닦아 증명하였기에, 네 가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며 무작(無作)한 묘한 공덕을 자유자재로 이루어냈나이다." 하셨다. 관음보살은 이근의 원만한 통달을 실천하여 부처의 과와 무등보리를 증득하셨고, 본체에서 작용이 드러나 이미 열매를 맺은 자리에서 인연을 수행하니 자연스럽고 자재롭게 움직이신다. 이것이 이른바 자유자재로 이루어낸다는 뜻이다.

네 가지 상상할 수 없고 무작(無作)한 묘한 공덕은 이러하다. 곧 형상을 나타냄의 불가사의, 진언을 설하는 것의 불가사의, 시주를 받는 것의 불가사의, 시주를 베푸는 것의 불가사의이다. 형상을 나타내든, 진언을 설하든, 시주를 받든 베푸든, 이 모든 것은 범부의 생각과 말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어 직접 증득해야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을 네 가지 불가사의라 한다. 이 네 가지 불가사의한 공덕은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어느 때나 저절로 일어나니 이를 무작(無作)이라 하며, 이 네 가지 공덕이 지극히 뛰어나고 깊어 묘(妙)한 덕이라 이른다.

1. 형상을 나타냄의 불가사의

한 몸 속에서 무수한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 형상 현현의 불가사의이다. 삼매 속에서 관음보살은 듣는 바를 안으로 돌려 소리로부터 벗어나, 육근과 그 대상이 모두 소멸되고 청근과 들리는 소리가 다할 때까지 나아간다. 한 근이 본래 자리로 돌아가면 여섯 근이 모두 해탈된다. 보고 듣고 맡고 아는 것이 더 이상 여섯 개의 분리된 근으로 나뉘지 않고, 걸림 없는 완전한 융합을 이루어 여섯 근이 서로 그 기능을 나눠 쓴다. 더 나아가 듣는 것이 소멸했다는 데에도 집착하지 않아, 아는 자와 아는 바가 함께 비워진다. 비움과 지혜가 완전히 이루어진 뒤에는 비워진 것조차도 사라져, 모든 생사가 소멸되고 열반이 나타난다. 세속과 초월을 동시에 뛰어넘어 식(識)을 지혜로 바꾸고, 열방을 두루 비추어 부처와 동등함을 증명한다. 중생을 구원하는 데 적합한 어떤 몸으로 모습을 드러내 법을 설할 뿐만 아니라, 한 몸 안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묘한 형상을 함께 나타낼 수도 있다.

능엄경에 말씀하시기를, "한 머리, 세 머리, 다섯, 일곱, 아홉, 열한 머리, 이와 같이 백팔 머리, 천 머리, 만 머리, 팔만 사천 금강 머리. 두 팔, 네, 여섯, 여덟, 열, 열두, 열네, 열여섯, 열여덟, 스물에서 스물넷, 이와 같이 백팔 팔, 천 팔, 만 팔, 팔만 사천 수인 팔. 두 눈, 세 눈, 네 눈, 아홉 눈, 이와 같이 백팔 눈, 천 눈, 만 눈, 팔만 사천 청정한 보배 눈. 어느 때는 자비롭고, 어느 때는 위엄이 있으며, 어느 때는 평온하고, 어느 때는 지혜로워 중생을 구원하시니 대해탈을 얻게 하신다." 하셨다.

자비로운 표정은 따뜻하고 친근하며, 위엄스러운 표정은 엄숙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하게 한다. 손은 중생을 건지려고 뻗어 있고, 눈은 만물을 비추려고 빛난다. 자(慈)는 인(仁)의 표징이요, 비(悲)는 용(勇)의 표징이요, 희(喜)는 정(定)의 표징이요, 사(捨)는 명(明)의 표징이다. 보살이 이 무수한 형상과 무수한 손·눈을 나타내심은 오로지 중생을 구하기 위함이다. 중생의 근기(根機)와 성향이 저마다 다르므로 나타내시는 상도 각기 그에 따라 다르다. 고통받는 중생에게는 자비로운 상으로 나타나 즐거움을 얻게 하고 그 선근(善根)을 보호하시며, 포악하고 해를 끼치는 중생에게는 위엄스러운 상으로 나타나 그 악업을 굴복시키시고, 흐트러지고 들떠 있는 중생에게는 고요한 상으로 나타나 그 산란한 마음을 잠재우시며, 미혹한 중생에게는 지혜로운 상으로 나타나 무명(無明)의 어둠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이 모든 상은 작의(作意) 없이 자연히 일어나되, 중생을 구원하여 괴로움을 덜어주고 즐거움을 가져다주며, 악업을 소멸하고 정법(正法)을 드러내신다. 이를 대자재(大自在)를 증득하셨다고 한다.

2. 진언(眞言) 설(說) 불가사의(不思議)

진언(眞言)이란 부처님과 보살이 삼매 가운데 설하신 비밀스러운 말씀이다. 헤아릴 수 없는 신묘한 신력을 품고 있어 중생의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소멸시킬 수 있다. 이것은 다라니(陀羅尼) 가운데 한 종류로서 만다라(만다라) 다라니에 속한다. 부처가 무량하시므로 보살도 무량하고, 보살이 닦으신 삼매도 무량이므로, 그들이 설하시는 신묘한 진언 또한 무량하다.

관세음보살은 마침내 여환문삼매(如幻聞三昧)와 금강삼매(金剛三昧)를 닦으사, 모든 뿌리(六根)와 그 대상(六境)을 소진하시고 육해탈(六解脫)과 일멸(一滅)을 얻으셨으며, 보시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아는 것이 더 이상 여섯 뿌리(六根)로 나뉘지 않는다. 하나로 완전히 융합되어 걸림이 없고, 순수하며 근본적인 보배(寶)와 같은 자각(自覺) 마음을 체득하셨으며, 여래장(如來藏)의 근본 깨달음 법신(覺性法身)에 들어가는 것을 입증하셨다. 이 본체(體)에서 기능(用)을 펼치시므로, 무량한 묘한 형상을 나타내시고 무량한 신묘한 진언을 설하실 수 있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이르기를, "'둘째, 나의 청각(聽)과 관조(觀照)로 六塵에서 벗어나니, 마치 소리가 담장을 지나가듯 아무것도 나를 막지 못한다. 따라서 나의 묘한 능력이 모든 형상을 나타내고, 모든 진언을 외우며, 모든 중생에게 두려움 없음을 줄 수 있다. 이 까닭에 시방(十方) 미진토(微塵土)의 모든 나라는 나를 시무외자(施無畏者)라 부른다.'"라고 하셨다.

나타내시는 각각의 형상에는 인간의 형상뿐 아니라 십이류(十二類)의 모든 중생의 모습이 들어 있으며, 설하시는 각각의 진언에는 인간의 말뿐 아니라 십이류의 모든 중생의 말이 들어 있다. 그리고 시방(十方)의 미진토(微塵土) 나라는 사바세계(娑婆世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관세음보살은 시방(十方) 미진토의 나라들에서 가지각색의 형상을 나타내시고 가지각색의 진언을 설하심으로써 중생의 재앙을 소멸하시며, 모든 중생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게 하신다. 이 때문에 이 미진토 나라의 모든 중생은 관세음보살을 시무외자(施無畏者)라 부른다.

3. 수향(受供) 불가사의(不思議)

중생의 六根이 六境에 접촉할 때, 그것에 속박될 뿐 아니라 그것에 이끌려 무명(無明)과 업(業)을 일으키고, 생사(生死)를 유전하면서도 해탈하지 못한다. 이 까닭에 六根이 청정(淸淨)하지 못한 것이다. 금강삼매(金剛三昧)의 가운데에서 관세음보살은 밖으로는 六塵을 물리치시고, 안으로는 六根의 매듭을 풀어 주신다. 六根이 서로 합쳐져 순수한 성(性)의 자리로 돌아가므로, 마침내 모든 六根이 청정해진다.

순수한 근본(根本)에 관해 말할 때, 이는 귀근(耳根)을 가리키며, 관세음보살이 이로써 원만(圓滿)한 통달을 성취하셨습니다. 원만·통달·항구(恒常)라는 세 가지 진실(眞實)을 갖춘 이 순수한 귀근에 의거하여 수행하고 도를 검증하시며, 온갖 진(塵)을 소진하고 모든 허망(虛妄)을 물리치셨습니다. 순수하고 묘한 이치에 들어감을 깨달으셨기에, 인간의 세계에서 자유로이 활동하실 수 있습니다. 보살이 방문하시는 모든 세계에서 중생들은 가장 귀한 보배를 내어놓으며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보살핌과 수용을 구합니다.

물론 보살의 지혜는 이미 완전히 구족되셨고 번뇌도 모두 소진되었기에, 속세의 더러운 보배를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시든 중생을 구제하여 그 고통을 덜어주시고 기쁨을 주십니다. 감사한 중생들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가장 소중한 소유물을 공양으로 바치며, 향과 등불, 나아가 자신의 팔이나 손가락을 태울 정도로 헌신합니다. 보살께서는 중생에게 기쁨을 주고자 하시어 이러한 공양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그것을 불법 수행으로 변화시키십니다. 법화경(蓮華經)에 이르기를, "바로 그때 관세음보살이 사부대중과 모든 천룡·인간·비인(非人) 중생을 자비하여, 그들이 올린 보배로 된 목걸이를 받아 두 부분으로 나누셨으니, 하나는 석가모니 부처님께 봉헌하시고, 다른 하나는 다보부처탑(多寶佛塔)에 봉헌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공양을 받으심의 불가사의함입니다.

4. 불가사의한 공양 행위

관세음보살은 불가사의하게 공양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위로는 시방(十方)의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시며, 아래로는 육도(六道)의 중생을 이롭게 하시니, 이 모두가 불가사의합니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 이르기를, "넷째, 내가 부처의 마음을 얻었으니, 궁극에서 검증되어, 갖가지 보배를 사용하여 시방의 여래(十方如來)께 공양을 올릴 수 있으며, 법계(法界)의 육도 중생에게까지 이른다. 아내를 구하는 자는 아내를 얻고, 아들을 구하는 자는 아들을 얻으며, 삼매를 구하는 자는 삼매를 얻고, 장수를 구하는 자는 장수를 얻으며, 나아가 대열반(大涅槃)을 구하더라도 대열반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부처의 마음이란 곧 일체 부처님이 검증하신, 오염되지 않은 참 마음, 묘각지성(妙覺知性)의 마음입니다. 중생은 본래 이 묘각지성의 마음을 갖추고 있으나, 무시(無始) 이래로 육진(六塵)에 가리어 각성에서 등을 돌고 망상에 덮여 있습니다. 이제 귀문원통(耳門圓通)을 수행하신 관세음보살은 온갖 진을 소진하고 지혜를 구족하셨기에, 부처의 마음을 얻으시고 그것을 궁극까지 검증하셨습니다. 보살께서 이미 이 본래 빼앗길 수 없는 보배를 갖추고 계시기 때문에, 갖가지 보배를 사용하여 위로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실 수 있으며, 아래로는 육도의 중생을 이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중생들이 무엇을 구하든 — 세속의 재물이든, 초세적 법의 재물이든 — 모든 요청이 이루어집니다.

삼매(三昧)란 선정(禪定), 곧 meditative absorption을 가리킵니다. 세속의 삼매와 초세적 삼매가 있습니다. 욕계(欲界)의 중생은 온기(煖氣)·의식(意識)·수명(壽命)을 자신들의 수명으로 삼고, 이승(二乘)의 수행자는 공(空)의 지혜를 수명으로 삼으며, 권교(權敎)의 보살은 세속적 지혜를 수명으로 삼고, 원교(圓敎)의 보살은 중도(中道)의 지혜를 수명으로 삼으며, 부처님은 일체지(一切智)를 수명으로 삼으십니다.

여기서의 대열반(大涅槃)은 이승(二乘)이 증득한 유여열반(有餘涅槃)이나 무여열반(無餘涅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부처님이 가르치신 삼보밀장(三寶秘藏)을 가리킵니다. 관세음보살은 아뢰야식(阿頼耶識)을 검증하시고 일체 법의 법성(法性)이 평등함을 깨달으셨기에, 부처님과 중생 모두에게 공양을 올릴 수 있으며, 세속의 재물과 초세적 법의 재물 모두를 베풀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무연(無緣)한 묘한 신력은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면, 관음보살의 수행과 증도의 방법과 과정이 고대 관음여래의 가르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청(聽)·사(思)·수(修)를 통해 수행하여 삼매(三昧)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삼매를 여환(如幻) 청원삼매(聽思修三昧) 금강삼매(金剛三昧)라고 합니다. 이 금강삼매를 수행하고 증득하려면 이근(耳根)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근이 외부의 성(聲)을 따라가지 않고, 안으로 돌아가 이근 자신의 본성을 듣습니다. 성인의 흐름에 들어서 모든 외물을 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청(聽)을 돌려 성(聲)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감각 기관만이 그 대상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이근 자체도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근(根)과 객(境)이 함께 사라짐이라고 합니다. 아는 내적 근도 없고, 알려지는 외적 대상도 없으므로, 아상(我相)이 끊어지고, 공(空)이 증득되며, 성스러운 과(果)를 얻어, 육도(六道)를 초월하고 중생의 분단된 생사(分段生死)를 완전히 끝냅니다.

관음보살은 계속 수행해 나아갑니다. 아상(我相)이 공(空)일 뿐 아니라, 법상(法相)도 또한 공(空)이며, 아상과 법상 모두를 비우는 공(空)의 지혜조차도 비워집니다. 이것이 곧 '법이 해방되면, 공(空)도 비공(非空)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삼매에서 그는 양단(二端)에 집착하지도, 중도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아홉 영역(九界) 사이를 자유로이 흘러다니며, 세속에 들어가 중생을 이롭게 하고, 한 걸음씩 점차 나아가고 깊어지면서, 무명(無明)을 부분적으로 끊고, 법신(法身)을 부분적으로 증득합니다. 마침내 무명이 다하고, 생사가 끝나며, 법신이 드러나고, 진심(眞心)이 나타나고, 여덟째 아뢰야식(阿頼耶識)이 대원경지(大圓鏡智)로 전변(轉變)되어, 범부와 성현의 세계를 동시에 초월하고 모든 부처와 동등함을 증득하여 두 가지 최고의 공덕을 얻습니다.

모든 부처의 근본 묘한 깨달은 마음에 부합하며, 모든 부처와 동일한 자비의 힘을 나누고 있기 때문에, 그는 삼십이응신(三十二應身)을 나타내 모든 땅에 들어가 중생을 고난에서 건져 기쁨을 줍니다. 모든 중생과 동일한 자비와 동경을 나누고 있기 때문에, 십사무위(十四無畏)와 사불사의(四不思議)를 모든 중생에게 베풀 수 있습니다. 완벽한 통원을 얻은 이래 현재 순간까지, 그리고 지금부터 먼 미래까지, 그는 항상 그러합니다. 십방 세계의 무수한 모습으로 나타나 무수한 만트라를 설하여 중생을 해방시키니, 마치 문수보살이 말씀하시듯, "고통에서 벗어나 해방되었도다 — 관음이여, 강가(恒河)의 모래알 수 겁(劫)을 지나 티끌 같은 부처의 나라에 들어가, 큰 해방력을 얻고, 중생에게 무위를 베푸는 자여."

이것이 관음보살이 수행하고 증득한 길, 곧 이문(耳門)의 원통(圓通)입니다.

친구들이여! 관음법문(法門)이 곧 이문 원통임을 알아주십시오. 이 길을 수행하면 저절로 범부가 성인이 되고, 각성을 거쳐 묘각(妙覺)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문 원통을 수행하기에 앞서, 모든 부처가 말씀하신 네 가지 청정한 가르침과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따라야 할 뿐 아니라, 수능엄경(楞嚴經)을 철저히 공부하여, 보리의 참된 수행인 오십이위(五十二位)와 오십종음마(五十種陰魔)의 미묘한 본성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도달하지도 않은 경지를 내세우거나, 증득하지도 않은 도(道)를 주장하거나, 마(魔)의 경계에 현혹되어 마도(魔道)로 떨어져 마(魔)의 무리가 되는 일이 없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조금이라도 참선을 하다 선정의 경계가 일어나면 즉시 거기에 집착하여 스스로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거짓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오만하고 미혹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견(邪見)의 씨앗을 사방에 뿌려 자신과 타인을 함께 미혹합니다 — 이는 중대한 죄악입니다. 보통의 초보 불자들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진위를 분별하지 못해, 이들로 인해 잘못 마도의 길로 들어갑니다. 참으로 가엾은 일입니다. 이런 까닭에 저는 오늘 여러분 모두에게 관음보살이 수행하고 증득한 길, 곧 '이문 원통'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모두 맑은 분별력을 길러,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올바른 것과 곡된 것을 가려 악마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제가 가장 깊이 바라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