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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앞서 말씀드렸듯 가난한 아들이 방황하는 근원은 그가 삼보(三寶)를 버린 데 있습니다. 긴 윤회를 거치는 동안 그의 대승(大乘) 선근(善根)은 퇴색했으나, 출리심(出離心)만은 줄어들지 않았기에 부처님을 만나고 법을 듣는 것으로 해탈할 수 있는 업연(業緣)을 갖추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가난한 아들이 방황하는 근원은 그가 삼보(三寶)를 버린 데 있습니다. 긴 윤회를 거치는 동안 그의 대승(大乘) 선근(善根)은 퇴색했으나, 출리심(出離心)만은 줄어들지 않았기에 부처님을 만나고 법을 듣는 것으로 해탈할 수 있는 업연(業緣)을 갖추었습니다.

또한 부처님의 제도를 받기 위한 근본 전제는 출리심이며, 이는 삼승(三乘)의 선근이기도 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고통을 해결할 수 없더라도 최소한 그것이 고통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苦)를 아는 것', 즉 지고(知苦)로, 가장 기초적인 수행이자 부처님이 중생을 해탈로 인도하시는 첫 문턱입니다. 인생이 고통임조차 모른다면 해탈로 이끌어갈 수 없습니다. 결국 모든 수행의 원동력은 고통을 인식하고 생겨난 출리심에서 나오며, 그 밖의 것은 모두 점차 길러나갈 수 있습니다.

이 가난한 아들은 대승의 지혜와 보리심(菩提心)을 잃었으나, 출리심으로 고통을 느끼는 마음만은 온전히 남아 있습니다. 부처님이 그를 만나신 후, 그의 선근을 회복하시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인생이 고통임을 알고 마음속에 출리심을 품고만 있다면 모든 수행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그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계기로 사성제(四聖諦)를 배우고 수행하도록 이끌어 소승(小乘)의 길로 들어서게 하십니다. 그가 사성제를 수행한 뒤, 가난한 아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시기 위해 부처님은 화려한 가사를 벗어 던지고 낡고 더러운 옷으로 갈아입으십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가난한 아들과 어떻게 교류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 때 장자가 일꾼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부지런히 일하고, 게으르거나 맡은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 이는 내가 아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방편(方便)이니라." 다시 그에게 말하기를 "청년이여, 내 말을 들으라. 너는 이 일을 계속하고 다른 곳에 가지 말라. 내가 너의 품삯을 올려 주리라.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거든—솥, 그릇, 쌀, 밀가루, 소금, 식초, 그 밖의 어떤 필수품이든—주저하지 말고 말하기만 하라. 나에게는 늙고 낡은 하인들도 있으니, 그들에게 필요한 것 역시 모두 공급해 주리라. 마음을 편안히 가지라. 나는 너에게 아버지와 같으니, 더 이상 근심하지 말라. 어찌하여 그러한가? 나는 이미 늙었고, 너는 젊고 강하다. 네가 일할 때 결코 속이지 않고, 게으르지 않으며, 성내거나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일꾼들에게서 보았던 그 어떤 허물도 네게서는 보지 못하였다. 오늘부터 나는 너를 내 아들처럼 대하리라." 장자는 곧바로 그에게 새 이름을 지어 주며, 자신의 아들이라 불렀다.

이것이 부처님이 가난한 아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소승의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을 설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익(蕅益) 대사는 이를 일곱 가지 범주로 나누어, 통틀어 칠각분(七覺分)의 일곱 범주라 하였습니다.

먼저 첫 번째 범주를 살펴보겠습니다. "일꾼들에게 말하였다"는 것은 사념처(四念處)의 수행에 해당합니다.

부처님은 변소를 청소하던 가난한 아들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에게 무엇을 수행하라고 이끄시는가? 바로 사념처입니다. 이 수행은 사성제 길의 핵심 수행으로, 관찰 대상은 네 가지입니다. 몸(身), 느낌(受), 마음(心), 법(法)이 그것이지요. "몸과 느낌"이 한 쌍을 이루고, "마음과 법"이 또 다른 쌍을 이룹니다.

우리는 육체와 감각적 느낌에 애착과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에, 부처님은 부정관(不淨觀)과 고관(苦觀)으로 이런 번뇌를 대치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왜 우리가 애착을 느끼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대개 물질적 세계, 즉 육체에서 비롯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어떤 형태의 유희를 즐길 때 그 애착은 육체에서 생겨나기도 하고, 내면의 느낌, 즉 마음의 상태에서 비롤되기도 하지요.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이런 쾌락적 감각을 갈구할 때, 부처님은 그것이 부정(不淨)하고 괴로움(苦)인 것임을 관찰해 정면으로 마주하도록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사실 사념처를 닦을 때에는 별상관(別相觀)과 총상관(總相觀)이 있으나, 실제 수행에서는 두 가지가 함께 쓰입니다. 예를 들어 갈애(渴愛)와 애착을 대치하기 위해 정토(淨土) 전통의 수행자들 역시 이 대치법을 닦아야 합니다. 사바세계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 바로 갈애와 애착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갈애와 애착을 대치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부정관이고, 다른 하나는 고관입니다. 부정관이란 물질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가 즐거운 느낌을 가져다주더라도, 그 행복이 잡염(雜染)에 물들어 있고 본래 부정(不淨)한 것임을 기억하는 수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