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taining Buddhahood in This Very Life
화엄(華嚴)의 한 스님이 혜해(慧海) 스님께 물었다. "존자님, 무정물도 부처라 여기십니까?" 스님이 답하였다. "여기지 않습니다. 만일 무정물이 부처라면,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자보다 나을 것이 없고, 죽은 말과 죽은 개가 오히려 살아 있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경에 이르기를, 부처의 몸은 곧 법신(法身)이라, 계(戒)·정(定)·혜(慧)와 삼명(三明)·육신통(六神通), 모든 선한 법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무...
화엄(華嚴)의 한 스님이 혜해(慧海) 스님께 물었다. "존자님, 무정물도 부처라 여기십니까?" 스님이 답하였다. "여기지 않습니다. 만일 무정물이 부처라면,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자보다 나을 것이 없고, 죽은 말과 죽은 개가 오히려 살아 있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경에 이르기를, 부처의 몸은 곧 법신(法身)이라, 계(戒)·정(定)·혜(慧)와 삼명(三明)·육신통(六神通), 모든 선한 법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무정물을 부처라 주장하신다면, 존자, 지금 즉시 돌아가셔서 부처가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planatory Note
《법보당경(法寶壇經)》에 이르기를, "양다리 성귀(兩足尊)인 깨달음에 귀의하라, 욕념 떠난 성자(離欲尊)인 바른 도에 귀의하라, 무리 가운데 성자(衆中尊)인 청정에 귀의하라. 오늘부터 깨달음을 스승으로 삼고, 이단 마귀와 외도(外道)를 등져라. 자성(自性)의 삼보(三寶)로써 늘 스스로 증험할지니, 참된 벗들이여, 자성의 삼보에 귀의하라. 부처는 곧 깨달음이요, 법은 곧 바른 도요, 승가는 곧 청정이다!"
자기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면 망상이 일어나지 않고, 욕심이 적어 만족하며 재물과 색욕을 놓을 수 있으니, 이것이 양다리 성귀다. 자기 마음이 바른 도에 귀의하면 한 생각에서라도 잘못된 견해가 일어나지 않는다. 잘못된 견해가 없으면 교만·탐·진·치가 없으니, 이것이 욕념 떠난 성자다. 자기 마음이 청정에 귀의하면 온갖 세속의 번뇌와 탐욕, 감각의 대상에 마음이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으니, 이것이 무리 가운데 성자다. 이 도를 닦는 것이 곧 자기 자신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속인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밤낮으로 삼귀(三歸)의 계를 수지(受持)한다. 부처께 귀의한다 하되 그 부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부처를 볼 수 없는데 무엇에 귀의한다는 것인가? 이리 말하는 것은 허망에 떨어지는 것이다! 선한 벗들이여, 스스로 살펴 자기 마음을 그르치지 말라. 경에 분명히 일렀으니, 우리는 남의 부처가 아니라 제 마음의 부처에게 귀의한다. 제 마음의 부처로 돌아가지 않으면 귀의할 곳이 없다. 이제 스스로 깨달았으니, 각기 자기 마음의 삼보에 귀의해야 한다. 안으로는 마음의 본성을 닦고, 밖으로는 남을 공경하는 것, 이것이 참된 자귀(自歸)다.
《법보당경》에 또 이르기를, "마음이 평안하면 어찌 인위적으로 계를 지키겠는가? 행위가 바르면 무슨 이유로 선(禪)을 행하겠는가? 감사는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요, 의로움은 모든 계층에 두루 서로 돌보는 것이다. 양보하면 어른과 젊은이가 화목하고, 참으면 모든 다툼이 그친다. 나무를 마찰하여 불을 일으킬 수 있으면 진흙에서 붉은 연꽃이 반드시 핀다. 쓴맛이 좋은 약이요, 거친 말이 충성스러운 충고다. 허물을 바로잡으면 항상 지혜가 일어나고, 단점을 숨기는 것은 현인이 할 바 아니다. 일상에서 늘 이로움 되는 일을 행하라, 깨달음은 재물을 흩어주는 데서 오지 않는다. 보리는 마음에서만 구하니, 어찌 바깥에서 헛되이 이상한 것을 찾으려 하겠는가? 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한다면, 서방 정토(淨土)가 바로 눈앞에 있느니라."
송산(嵩山) 원귀(元珪) 선사가 이르기를, "부처는 모든 상(相)을 비우고 일체 법의 지혜를 증득할 수 있으나, 정해진 업의 과보를 일시에 소멸하지는 못한다. 부처는 일체 존재의 이치를 알고 과거와 미래의 일을 다 헤아릴 수 있으나, 업의 인연이 없는 중생은 가르치고 인도할 수 없다. 부처는 무량한 중생을 제도할 수 있으나, 중생의 세계를 끝내 비울 수는 없다. 이것이 곧 부처가 못 하시는 세 가지다. 정해진 업의 과보는 영구하지 않고, 업의 인연이 없음도 한 생에 지나지 않으며, 중생의 세계는 늘지도 줄지도 않았고, 그 법을 다스릴 이 또한 없었다. 법은 있되 스승이 없으면 이를 '법이 없다(無法)'라 하고, 법도 없고 스승도 없으면 '무심(無心)'이라 한다. 내가 보건대 부처 또한 신통(神通)이 없다. 다만 무아(無我)의 마음으로 일체 법을 본래 있는 그대로 놓아둘 뿐이다."
무정(無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면 무정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정한 듯 행동하는 사람은 온갖 악만 가득하고 한 가지 선도 없다. 모든 사람이 본래 천부적으로 도덕적 감각(良知)을 가지고 태어남은 마땅하다. 만일 누군가 이 천부적 감각이 결여되어 저급한 욕망에 빠지고 천리(天理)를 파괴한다면, 어린이라 해도 북을 울려 그를 규탄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그를 죽이는 것도 마땅하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온 나라 백성에게 죄값을 갚아야 할 것이다. 오직 이 천부적 감각이 있어야 비로소 몸과 마음을 다스릴 수 있고, 몸과 마음을 다스리면 깨달음에 이르며, 날마다 작은 깨달음을 쌓아 꾸준히 힘을 기울이면 점차 고귀한 성품을 이루어 갈 수 있다. 순자(荀子)가 《권학(勸學)》에 이르기를, "흙을 쌓아 산을 이룬 뒤에는 비바람이 그 가운데서 일어나고, 물을 모아 깊은 못을 만들면 용이 그 속에서 난다. 착한 일을 쌓아 덕을 세우면 신묘한 식견이 저절로 일어나고, 성인의 마음이 온전히 드러나리라." 마음의 작용은 바른 생각을 일으키고 망상을 내쫓는 것,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 일어나는 길이다. 사람이 죽어 사대(四大)가 흩어지면 넋은 집이 없고 마음은 할 일이 없으니, 어찌 깨달음이 있겠는가? 깨달음이 없는데 어찌 부처라 부를 수 있겠는가?
강음(江陰) 죽당(竹堂) 파하사실(罷夏室)의 스님이 이르기를, "인도의 고전에서 사람의 몸 얻기 어렵고, 부처의 법 듣기 어렵고, 부처의 길 완성하기 어렵다 하나, 이것이 궁극의 진리가 아니다. 중국 대승불교가 일어난 이래로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고, 이 한 생에서 도를 깨칠 수 있다고 일러 왔으니, 이는 거짓이 아니다. 도를 닦는 학인은 지극한 정성으로 참된 법을 들을 수 있고, 정진하는 마음으로 정신(正信)을 세울 수 있으며, 수신제가(修身齊家)의 발심으로 행동을 단속할 수 있고, 게을지 않는 정진으로 궁극의 과(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참선(參禪)에 통달한 자는 반드시 깨닫고, 도를 깨달은 자는 반드시 맑아지며, 마음을 맑힌 자는 반드시 목표에 이르며, 막힘 없는 통찰을 얻은 자는 반드시 원만히 성취한다. 이것이 곧 이 한 생에 부처가 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