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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을 높이고 북종을 가리다

신회(神會)는 육조 혜능(慧能)의 말년 제자이자 하택(荷澤) 종풍의 개조였다. 그는 남종(南宗)의 확립과 번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남종의 가장 위대한 수호자 중 한 사람이었다.

신회(神會)는 육조 혜능(慧能)의 말년 제자이자 하택(荷澤) 종풍의 개조였다. 그는 남종(南宗)의 확립과 번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남종의 가장 위대한 수호자 중 한 사람이었다.

신회의 속성은 고(高)씨였고, 호북(湖北) 양양(襄陽)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 여러 유교 및 도교 학파의 저술을 두루 살폈다. 훗날 《후한서(後漢書)》를 읽고 불교를 알게 되면서 법(法)에 이끌리게 되었다. 이후 국찰사(國昌寺)로 가서 호원(皓源) 스님 밑에서 출가 수계했다. 경론에 대한 그의 이해는 보통 스님들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 뒤 형주(荊州) 옥천사(玉泉寺)로 가서 신수(神秀) 밑에서 선(禪)을 배웠다. 측천무후(則天武后) 치하 구시(久視) 원년(700), 신수가 수도로 소환되어 법을 설하게 되자, 제자들에게 영남(嶺南)으로 내려가 혜능을 찾아 배우도록 권했다.

마흔 무렵, 신회는 남쪽 조계(曹溪)로 내려가 혜능에게 예를 올렸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육조와 처음 만났을 때 문답에서 신회의 말재주가 너무 드러나자 조사께서 매를 드셨다고 한다. 육조의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신회는 혜능에게 귀의(歸依)하였고, 이후 노스승의 말년에 가장 아끼는 제자가 되었다. 육조의 입적(入寂) 전 어느 날, 방에서 대중에게 이르었다.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이름도 없고 말도 없으며, 앞도 없고 뒤도 없다. 너희는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대중 속에 서 있던 신회가 대답했다. "모든 부처의 근본 원천이며, 일체 중생의 불성(佛性)입니다."

육조가 말씀하셨다. "이름도 없고 말도 없다고 했거늘, 너는 '근본 원천'이니 '불성'이니 다시 말을 갖다 붙이는구나."

훗날 육조는 다른 이들에게 신회가 견해 있는 학승(學僧)이 될 것(즉, 하택 돈오 종풍)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종(北宗)의 법맥이 빗나간 것이며, 그 수행법이 점수(漸修)이므로 정통 전법(傳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혜능의 남종만이 보리달마(菩提達磨)로 거슬러 올라가는 참된 선(禪) 법맥이라고 했다.

개원(開元) 22년 정월 보름, 신회는 화대(滑臺)의 대운사(大雲寺)에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었다. 대중 앞에서 그는 세상에 선포했다. "오늘 내가 이 대회를 열고 장엄하게 이 보리만다(菩提曼拏羅)를 세우는 것은 공덕을 위함이 아니요, 도를 구하는 모든 이를 위해 참된 가르침을 바로잡고 시비를 가리기 위함이다!"

그 후 신회는 당시 북방에서 가장 유명한 학승이었던 숭원(崇遠)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며, 남종의 종지를 천명하고 북종의 선법을 공격했다. 양측은 치열하게 맞섰고, 거의 주먹다짐에 이를 정도였다. 신회는 신념에 가득 차, 두려움 없이 말했으며, 무아(無我)의 헌신 정신을 온전히 보여주었다.

이 대회에서 신회는 또한 신수의 가장 저명한 제자인 보적(普寂)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보적은 신수를 보리달마의 정통 계승자로 여기고 자신을 신수 법맥의 수호자로 내세웠다. 당시 신수의 추종자들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들이 세워놓은 전법 계보를 감히 문제 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신회는 그 모든 것이 조작이라고 선언하며, 홍인(弘忍)은 결코 신수에게 법을 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바로잡은 법맥을 제시했다. 보리달마가 가사 한 벌을 법의 증표로 혜가(慧可)에게 전하고, 혜가에서 승찬(僧璨)으로, 승찬에서 도신(道信)으로, 도신에서 홍인으로, 홍인에서 혜능으로 — 6대에 걸쳐 단절 없이 이어진 법맥이라는 것이었다.

신회가 이어 말했다. "신수 선사께서 살아 계실 때, 스스로 제6대 전법의 법의가 조계에 있다고 하셨지, 결코 자신이 선의 제6대 조사라고 주장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복지 선사는 자기를 제7대 조사라 칭하면서 신수를 제6대라 거짓 주장하고 있으니, 이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이때 충원이 그를 꾸짖었다. "복지 선사는 일국의 명망이 있는 분입니다. 그를 이토록 공격하시는데 두렵지 않으십니까?"

신회는 태연하게 답했다. "제가 지금 이 자리에 나선 것은 대승을 펼치고 정법을 세워 천하 모든 중생을 위함입니다. 어찌 제 목숨을 아끼겠습니까?"

신회의 화태 법회에서의 열의 어린 발언에 힘입어, 회능의 가르침이 점차 북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남종이 정통으로 인정받는 날은 여전히 멀었고, 선의 북종과 남종 사이의 대립은 더욱 치열해져만 갔다.

천보 4년(745), 신회가 칠십여 세의 나이에 병부소경 송정의 초빙을 받아 낙양으로 건너가 하제사에 머물게 되었다. 이 무렵 북종의 거목이었던 부영 같은 인물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신회의 노력으로 조계의 돈오 가르침이 낙양은 물론 온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북종 수행자들의 더욱 격렬한 반격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여러 차례 암살 시도를 받았으나, 그때마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마침내 천보 12년에 당 현종에 의해 북부 수도로 소환되었다. 양보 없이 진실을 말한 대가로 강서 의양군으로 유배되었고, 다시 무당군으로 옮겨졌다. 천보 13년에는 형주(襄州)로, 그 후에는 형주(荊州) 개원사로 옮겨졌다. 이 모두가 사실은 북종 당파의 복수에 의한 것이었다.

신회가 두 해에 걸쳐 이곳저곳을 떠돌며 유배 생활을 하였지만, 그의 명성은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때마침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천하가 뿌리째 뒤흔들렸다. 뜻밖에도 이 재앙이 신회의 운명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군사 자금이 궁핍해진 조정에서 이부시랑 배면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량 제도를 시행하고, 도첩—곧 승려의 신분 증명서—를 팔아 향화 돈을 거두어 국고를 보충하기로 하였다. 신회는 이미 칠십을 넘긴 나이였고, 지대한 도덕적 권위를 지녔기에 만장일치로 이 일을 총괄할 인물로 뽑혔다. 그는 온정을 다해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모든 일을 세심하게 챙겼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군사 보급금을 마련하여 양경—동도와 서도—를 수복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한 것이다.

안녹산의 난이 평정된 뒤, 신회는 자연스럽게 국가의 공신으로 인정받았다. 당 소종이 그를 궁으로 불러들여 봉양하고, 소종은 또한 한 고위 장수를 특별히 보내 하제사에 신회의 선원을 짓도록 감독하게 하였다. 신회는 이 기세를 틈타 남종에 있어 중차대한 두 가지 일을 성취하였다. 첫째, 명장 곽자의를 통해 달마대사를 초조로 추존해 줄 것을 상주하게 하였고, 둘째, 광주 절도사 위려로 하여금 제6대 조사 회능의 전법 법의에 대한 황실의 후원을 청하는 표를 올리게 한 것이다.

이로써 회능의 남종은 자연스럽게 정통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신수의 북종은 자취를 감추었다.

회능이 남종의 개조였다면, 신회는 회능의 헌신적인 제자로서 남종의 위대한 수호자이자 전파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 덕종 진원 12년(796)에 조정은 마침내 신회를 선의 제7대 조사로 정식 인정하였다. 이로써 회능을 대표로 하는 남종이 선불교의 정통 법계로 공식 확립되었다.